정책 부재, 심판 열기만 높았던 총선
미국과 유럽의 정교한 AI 규제 행보
복합 위험 키우는 '제도 지체' 막아야
여야가 동시에 '심판'을 내세웠던 총선이 막을 내렸다. 명백히 기울어진 추는 심판에 대한 민의를 비교적 분명하게 대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책 대결은 철저히 부재한 선거였다. 어떤 정책도 심판을 압도하기 어려웠던 현실의 반영일 수도, 호불호가 엇갈릴 정책으로 심판 정서를 흩트리지 말자는 전략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정치에서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청산과 심판 키워드는 이번에도 산적한 주요 정책 의제와 제대로 엮이지 못했고, 선거는 정책 공론장이 될 수 없었다. 복합위기와 전환을 헤쳐갈 사회 비전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래 위험에 대한 정책 의제가 수면 아래 잠들어 있다.
미래 핵심 정책 의제가 창고 속에 방치되는 상황이 일반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예로 2016년 이후,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출현 이래 압도적 속도로 내달리는 기술의 위험에 대한 규제적 접근에 여러 국가가 속도를 내고 있다. 기술 시스템의 안전을 확보하고 인간 기본권을 보호하고 인공지능 기술 표준 정립의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제도적 접근이 대서양의 양안에서 급진전되고 있다. 지난달 이 지면에서 소개했던 플랫폼 노동지침에 합의한 유럽연합은 그에 앞서 인공지능법에 대한 의회 승인을 획득했다. 적용 대상과 범위, 리스크 분류 및 관리체계, 투명성 의무 등 실로 방대한 조항을 포괄할 뿐 아니라 생성형 인공지능의 위험까지 반영하는 빠르고 유연한 전략적 입법 행보를 보여준다. 글로벌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미국도 적극적이다. 작년 10월 말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한 강력한 행정 명령이 그 예다. 연방정부뿐 아니라 주정부의 행보도 적극적이다. 지난 3월 말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 테네시의 주지사는 음악에까지 확대된 생성형 AI의 잠재 위험으로부터 6만여 명에 이르는 음악 산업 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소위 엘비스 법안에 서명했다.
혁신 기술에 대한 높은 사회적 수용도와 적응력을 지닌 우리 사회에서도 인공지능 기술 적용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한층 복잡해진 위험에 대한 사회일반, 노동자 및 노동조합의 인식 정도는 높지 않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 선거에서도 양대 거대 정당의 핵심 정책 과제에 인공지능 기술 규제나 관련 노동자 보호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담론은 일자리 대체에 대한 과장되고 단순한 우려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인공지능 기술이 중급 수준의 다양한 인지·창의 작업을 쉽게 자동화할 수 있을 정도로 올라와 있으므로 과장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연성을 상쇄하거나 다변화할 조건, 특히 제도와 사람과 기술의 상호작용에 따라 기술의 대체와 역량 증강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노동제도를 정비하자는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또 일자리 상실 이후의 복원력에 대한 노동자 간 격차나 채용 등 삶의 기회를 배분하는 데 적용되는 AI 기반의 의사결정이 사회적 불평등을 영속화하고 악화시킬 수 있다는 AI 편향성에 대한 경고도, 그에 대한 대응도 본격화되지 않고 있다. 2020년 대학 입시에 머신 러닝 사용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던 영국 등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챗GPT 출시 전 크라우드 소싱을 통해 유해콘텐츠 거름 노동을 한 수많은 케냐의 저임금 노동자가 외상 후 증후군에 시달렸다는 국제 뉴스는 비단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사라지지 않을 일자리인 이들 콘텐츠 모더레이터의 유령 노동 위험은 우리 사회에도 있다.
이 밖에도 제도의 지체 속에 복합 위험이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빠르게 틈입하고 있다. 이런 위험이 관리되지 못하면 기업도 위험에 빠진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외국 규제의 범위가 국제적이므로 자체 규제를 빨리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시급한 것은 우리 사회의 위험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관리하며 제도를 발전시킬 책임 있는 통합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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