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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천국' 출신 작가가 '식인이 합법화된 세계'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입력
2024.04.20 11:00
수정
2024.04.21 13:1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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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아르헨티나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식인 합법화 그린 소설 ‘육질은 부드러워’
“문학은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문”

장편 소설 ‘육질은 부드러워’를 쓴 아르헨티나의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Rocío Pedroza

장편 소설 ‘육질은 부드러워’를 쓴 아르헨티나의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Rocío Pedroza

모든 동물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동물에게 살짝 긁히기만 해도 죽는 상황에서 끼니마다 다양한 고기를 먹는 육식(肉食)은 어불성설이다. 바이러스의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은 난망하고, 두 명의 볼리비아 출신 실직자를 이웃 사람들이 잡아먹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시작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불법 이민자들이 단체로 사라지고 소외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학살당한다. 그리고 마침내 “각국 정부가 항복하면서 결국 식인 합법화가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 작가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50)의 장편소설 ‘육질은 부드러워’는 오늘날 육식 산업의 동물의 자리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인육에는 ‘특별육’이라는 이름이 붙고, 이들을 인간이라 칭하거나 인간처럼 대우하는 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된다. 이는 도살장으로 함께 끌려가 자신도 특별육의 신세가 될 정도의 중범죄다. 소설은 육류 가공 공장의 2인자로 일하는 ‘테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들이 죽은 이후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됐다. 오랜 난임 끝에 얻은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아내 ‘세실리아’는 친정으로 떠나버렸다.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 갈까

육질은 부드러워·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해냄 발행·208쪽·1만7,500원

육질은 부드러워·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해냄 발행·208쪽·1만7,500원

인류의 금기인 식인을 다룬 소설은 드물지 않았지만, ‘육질은 부드러워’가 다루는 세계는 더 본격적이고 노골적이다. 재난·기아 등 극한의 상황에 몰린 상황도, 식인종 같은 일부의 '일탈'도 아닌 식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식인을 인정하고, 특별육을 소비하는 인간 역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일상처럼 받아들인다. 소설은 복잡한 은유 없이 축산업에서 소, 돼지, 닭의 고기를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인간에게 사용한다. 씨수컷, 성장 속도를 높이려 유전자를 변형하거나 주사를 맞히지 않은 순종 1세대(FGP) 등 가축에게만 적용되던 개념을 인간에게도 적용한다.

이런 세계에서 테호가 FGP 암컷 한 마리를 선물 받는 순간 독자는 이야기의 전개를 예감하기 쉽다. 두 인간 사이에 ‘인간적’ 교류가 일어나고, 이는 메스꺼운 규칙에 균열을 내는 작은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고. 소설은 이런 도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듯 보인다. 테호는 그에게 ‘재스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서서히 가까워진다. 마침내 재스민은 임신한다. 이 아이는 화해를 가져오는 영웅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희생양일 뿐일까. 이 갈림길에서 소설은 돌연 모두를 거부해 버린다. 이미 충분히 비인간적으로 읽히던 서사의 결말은 인간의 이기심이 과연 어디까지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고기를 먹는 게 문화적이라면 인간도 서로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 소설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합법적으로’ 먹기까지의 경로를 묘사하는데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식물성 단백질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다는 언급이 잠시 등장할 뿐이다. 고기로 쓰이는 인간과 이를 먹는 인간의 차이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기로 결정했기에 그럴 뿐이라는 여상한 태도를 유지한다. 바스테리카는 영국 BBC방송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육점에 걸린 고기를 보고 ‘우리가 먹는 고기는 문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실에서도 문화적 합의로 어떤 고기를 섭취할지를 가를 뿐이기에 “우리 인간도 서로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나는 ‘육식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연간 1인당 소고기 소비량만 약 50㎏으로 지난해 한국의 소비량(14.8㎏)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작가는 드문 채식주의자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채식주의 홍보 책자를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그는 선을 그었다. 문학은 “다른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문”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소설을 읽고 한동안 고기를 먹는 건 힘들겠지만, 결말은 육식 자체보다 ‘인간성’을 잃은 인간 그 자체를 조명한다. 공장식 육식 산업뿐 아니라 여성, 이민자, 소수자 등 다른 집단을 향한 착취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도 짚는다. 지금도 ‘우리가 아닌’ 누군가를 착취하고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이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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