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의 10년] <5> 남겨진 사람들
30년차 직장인 김기현 부부가 견딘 10년
"도와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했어요"
30년차 직장인 김기현은 2021년 겨울,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장에서 서류를 뒤적이다 잠시 숨을 멈췄다. 1998년생 입사 지원서를 본 기현은 속으로 수를 셈해봤다. '그해 태어난 애들이 벌써 회사에 들어올 때가 됐구나.' 아이들이 잘 자란 게 기특하고 예쁘면서도 슬펐다. 또래인 기현의 맏아들은 여전히 고등학생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차장이었던 기현은 아침부터 몹시 바빴다. 경기 성남으로 출퇴근하던 때라 차가 밀리는 시간을 피해 한 시간이나 서둘렀건만 커피 한잔 마실 여유도 없었다. 거래처 주소를 확인하려고 인터넷을 켜자 '여객선', '침몰' 등을 제목으로 뽑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배편으로 수학여행을 간 아들 제훈이 생각났지만, 큰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찜찜한 마음에 뉴스창에 계속 눈이 갔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물에 뛰어내렸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제야 기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양해를 구했다. "아들놈이 좀 놀랐을 것 같은데 옷 좀 가져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양복에 구두, 출근했던 그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전남 진도로 향했다. '전원구조'(①) 속보를 보고 다른 부모들과 환호했지만, 막상 진도항에 도착해보니 고요한 수면 위로 뱃머리만 솟아 있었다. 그는 이튿날 바닷물에 손을 넣어보곤 직감했다.
'아무리 에어포켓(②)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찬 물에서 살지는 못했겠구나.'
그 순간 이른 아침 출근하며 본 아이방의 닫힌 문이 떠올랐다.
'우리 아들 죽었구나.'
세월호 참사로 아들 잃은 후 21일 만에 출근한 김 차장님
아이는 결국 8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수습이 늦어지는 통에 배에 갇힌 아이를 애타게 기다리던 다른 부모들은 기현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며 "잘됐다"고 했다. 기현은 이후에도 진도에 남아 같은 반 아이들이 모두 뭍으로 올라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는 5월 7일 회사로 복귀해 밀린 업무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다시 출근하던 날, 차창 밖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물을 참으며 바라본 창밖은 여름이 완연했다. 아직 진도와 동거차도에 있는 유족들이 생각났지만 "나 때문에 제훈이가 그렇게 됐는데 둘째와 아내를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2월생인 제훈이는 또래보다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월급쟁이 형편으로는 한 살 터울인 두 형제 놈을 대학에 연이어 보낼 자신이 없었다. 1년이라도 떼어 놓으면 큰 녀석이 군대 가있는 동안 둘째를 대학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의 짧은 생각 탓에…' 기현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는 그날 이후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에 빠져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거래처에선 기현이 모두에게 알려진 여객선 참사 유족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일과가 끝나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홀로 있을 아내 이지연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기현은 1996년 아내를 만났다. 65년생인 그가 서른 둘 되던 해였다. 지연은 "돈은 없지만 이 사람하고 살면 웃고 살 것 같아서" 연애 3개월 만의 청혼에 응했다. 부부는 1998년 첫째 제훈이가 태어나기 전에 구입한 작은 디지털 카메라로 아이들이 자라는 순간을 차곡차곡 담았다. 성인이 되면 앨범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기현은 월급날인 매달 21일 아침이면 무척 들떴다. 치킨과 피자를 먹는 날이라고 목빼고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집에 들어가는 길이 설렜다. 방학 때면 휴가를 얻어 비 새는 텐트를 차에 싣고 강원도에서 부산, 부산에서 전라도를 거쳐 서해안을 크게 돌았다. 꼬박 열흘간의 캠핑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즐거운 피로감 탓에 아내의 입에 수포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어느 여름 날 소낙비에 애써 쳤던 텐트를 접고 차에 탔다가 다시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웠더니 쏟아질 듯 반짝이던 별.
지연의 기도는 늘 "우리 가족 건강하고 무탈하게 해주세요"였다. 지연은 제훈이를 잃고선 '우리 가족만 생각하고 살아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참사가 발생한 그해 5월 무작정 주민센터에 찾아가 "제훈이 또래 중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연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부모님 없이 아무 의지할 곳 없던 아이 영수(가명)는 부부의 후원을 받으며 성인이 됐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 대한 후원도 이어가고 있다. 부부의 집에는 '김제훈 후원자님'이라는 우편물이 아직도 종종 온다.
"그 전까지는 아이들 잘 키우고 집안 잘 정리하는 게 삶의 전부였는데, 이제는 여러 사람을 볼 수 있게 됐어요."
고된 출근길, 그래도 아빠는 버텼다
기현의 출근길은 이따금 매우 고됐다. '공원에 시신을 놓는 게 말이 되나' '납골당 때문에 집값 떨어진다' 등의 현수막이 걸린 길을 지나야 했다. 그는 주차장에서 한참을 숨을 고르다 시동을 걸었다. 유족인 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보상금 더 받으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때마다 "집이고 뭐고 다 드릴 테니 우리 아이 살려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틴 기현은 회사 생활을 32년이나 했다. 부장으로 승진했고 둘째 제영이도 다 커서 직장을 얻었다. 그는 지난해 마지막 신입사원 면접을 끝으로 정년을 맞게 됐다. 면접장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의젓하게 앉아있는 청년들을 보니 제훈이가 생각났다. 나이가 같고 태어난 달까지 같은 지원자들을 볼 때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애써 서류를 고쳐 쥐곤 했다. 살아 있었다면 아들도 저렇게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을 텐데.
자유인이 된 기현은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진행된 전국 시민행진 '안녕하십니까'의 기수로 섰다. 곳곳에 핀 매화가 무색하게 거센 봄바람이 깃발을 마구 흔들었지만, 말없이 꽁꽁 언 손으로 깃발을 다잡았다. 그가 앞장선 행렬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갔다.
기현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던 건 3월 14일 그의 안산 자택에서였다.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잘 정돈된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 햇살 잘 드는 창가에는 회사 퇴임식 때 받은 감사패와 함께 앳된 소년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기현은 '제훈이는 어떤 아이였느냐'는 질문에 앨범 한 권을 꺼냈다. 신생아 사진으로 시작한 앨범은 유치원 현장학습에서 고구마를 캐고,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하늘색 체육복을 입고 달리는 모습을 담았다. 중학교 졸업 사진 등으로 이어지던 앨범의 마지막 페이지는 제훈이의 영정사진으로 끝났다. 부부는 기자에게 어릴 적 아들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웃었지만, 기현은 세수를 한다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기현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회사에 복귀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훈이를 기다리던 진도 체육관에서 풀어헤친 셔츠에 정장 재킷을 덮고 웅크린 채 잠시 잠에 들었다 꾼 꿈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들과 거실에서 놀던 큰아들은 해가 떠오르자 문을 열고 나가며 "이제 가야 한다"고 했다. 아들은 "여기가 네 집인데 어디를 가냐"고 우는 아빠를 꼭 안고 달래줬다. 울며 깨보니 누군가 덮어준 모포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참 온기가 생생했어요. 지금까지 그 온기 덕분에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받았지만 주저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기자에게 집 문을 열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게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죠.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것만 빼고는 어느 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무척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사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만약 저희 기사를 읽은 분들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저희처럼 아픈 일을 겪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나중에 제훈이 곁으로 갔을 때 '그래, 아빠 수고했어'라는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겠죠."
기현은 기자에게 "이름도 모르는 그분들께 감사 인사를 꼭 전해달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참사 직후 부모님들을 먹이고 입혔던 자원봉사자들을 향한 고마움이다. "진도 체육관은 그 많은 사람이 쓰는데도 우리 집보다도 더 깨끗했어요. 밥 먹여주고 옷 입혀준 그분들이 다 공무원인 줄 알았죠.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시민분들이었어요. 지금이라도 누군지 알면 꼭 찾아가 인사드리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없네요. 기회가 된다면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그날의 책임자들, 저울은 공정했을까> 인터랙티브 콘텐츠 보기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sew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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