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데 익숙해진 정당이 된 것 같다” 평가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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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계열의 보수 정당은 원래 ‘우리가 주류’라는 긍지가 높았다. 산업화를 이끌고(박정희 전 대통령) 군부독재를 종식한 민주화 성과(김영삼 전 대통령)도 밀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위 관료와 법조인 같은 엘리트 출신이 많다는 점에도 자부심이 있다. 예전엔 선거를 하면 보수가 승리하는 게 보통이었고 진보의 승리는 예외였다. 보수 정당은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을 한 수 아래의 비주류로 여겼다.
하지만 보수 정당이 주류라는 건 옛말이 된 듯하다. 2016, 2020, 2024년 총선에서 세 번 연속 졌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 탄핵됐고, 정권을 되찾은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총선 패배로 임기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위기를 맞았다.
사실 4·10총선은 보수에 불리한 환경도 아니었다. ①집권 여당 프리미엄이 있었다. 대통령 임기 중반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 심판론 영향도 있지만 정국 안정을 위해 여당에 힘을 실어주려는 유권자가 많다. 그래서 2012년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과반 승리했다. 2020년 총선 역시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180석을 얻어 압승했다. 2016년 총선에선 여당인 새누리당이 122석에 머물렀지만 국민의당 돌풍으로 3자 구도로 치러진 결과였다. 제1야당 민주당도 123석에 그쳤기 때문에 이번 같은 여당 참패는 아니었다.
②여론 지형이 보수화됐다. 흔히 성장을 우선시하면 보수, 분배를 중시하면 진보로 나눈다. 18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NBS)를 보자. '현시점에서 경제 성장이 소득 분배보다 더 중요하다'는 답변은 69%에 달했다. '소득 분배가 성장보다 중요하다'는 답변(27%)보다 훨씬 많다. 2022년 조사에서는 성장 우선이 64%, 분배 우선은 32%였다. 성장 중시 경향은 국민의힘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승했던 2년 전보다 더 뚜렷해진 것이다. ③고령 유권자 비중이 늘었다. 이번 선거는 60세 이상 유권자 비율(31.9%)이 39세 이하 유권자(30.6%)를 추월한 역대 첫 선거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국민의힘이 참패해 이제 패배가 체질화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1등을 놓치면 못 견딘다. 그것이 주류 의식이다. 보수 정당은 그간 선거에서 질 것 같거나 지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천막 당사를 치거나 무릎 꿇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외부 명망가를 모셔와 채찍질을 자처해서라도 시대에 맞게 바뀌려 애썼다.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다. 얼마 전 열린 국민의힘 당선자 총회는 화기애애했다. 절박함보다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소나기가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듯한 당 지도부의 모습을 보면 2등 자리가 편안해 보인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2일 국회 토론회에서 이런 국민의힘에 대해 “특별한 위기의식이나 절박함이 이제는 사라진 존재가 됐다”면서 “지는 데 익숙해진 정당이 된 것 같다”고 평했다.
보수 정당이 2등에 안주하면 정치 전반의 수준이 떨어진다. 선거는 상대 평가여서 경쟁자가 못하면 자신도 긴장을 풀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막말과 편법 대출로 물의를 일으킨 후보들을 안고 갔다. 그래도 이길 수 있는 선거라고 본 것이다. 여기엔 주류 의식을 놓아버린 국민의힘 책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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