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접목으로 한글 쓰임새 확장
일상에서 맥락 파악 못하는 성인 증가
"단순 어휘력이 문해력 재단하지 않아"
심심한 사과, 사흘, 고지식.
한국인이라면 이따금씩 쓰는 단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고급(?)' 어휘로 다가온다. 마음 깊이 사과한다는 뜻의 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 3일을 의미하는 사흘을 '4일', 고지식하다는 표현을 '높은(高) 지식'으로 오인하는 식이다. 얼마 전 한 유명 유튜브 채널이 배우 모집 공고를 올렸다가 뭇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모집 인원을 한 자릿수를 뜻하는 '○명'으로 표기했는데, 일부에서 "왜 한 명도 안 뽑으면서 공고를 냈느냐" 등의 비난 댓글이 빗발친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렇게 일상 속 어휘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이른바 '문해력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인은 의외로 많다. 문해력은 좁은 의미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지만, 최근 잦은 신조어 사용과 유튜브, 디지털금융, 키오스크 주문 등 첨단기술과 접목한 한글의 쓰임새가 확장되면서 세대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문장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려는 문해력 강의에 성인 수강생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인 8.7%가 글 읽기·활용 어려워해
"노랑 엄마와 빨강 아빠 사이에 주황 아이가 화목하게 모여 살고 있어요."
23일 오전 10시 서울 중랑구 묵동 중랑구립정보도서관 문화교실. '문해력을 부탁해' 수업에 참여한 수강생 13명이 진지한 자세로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이날 수업 주제는 '그림책에서 발견한 문해력'. 이들은 색깔 있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그림에 '가족'이라는 주제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수강생 전원은 성인이었다. 최수희(53)씨는 "그림책을 통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뿌듯해했다.
많은 성인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2021년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1'(초등 1, 2학년) 인구는 200만1,428명(4.5%)이나 됐다.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셈하기는 가능하지만 활용이 미흡한 '수준2'(초등 3~6학년)도 185만5,661명(4.2%)이었다. 전체 성인의 8.7%가 단어의 뜻과 맥락을 제대로 짚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인 문해력 교육에 힘을 쏟는 건 위기의식을 느낀 지방자치단체들이다. 중랑구립정보도서관은 문해력 교실을 평일과 주말반으로 나눠 운영해 가급적 많은 참여를 유도하고 신문기사, 그림책 등 다양한 교재를 활용해 이해를 돕는다. 특히 자기 계발 못지않게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들의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지유 중랑문화재단 도서관운영팀장은 "평일에 아이를 등교시킨 뒤 오는 학부모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 자녀를 둔 윤은서(45)씨는 "데이터를 소화하고 소통하는 부분까지 문해력에 포함된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면서 "아이들에게 넓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양평군, 강원 평창군 등 다수 지자체에서는 성인문해교실을 수료하면 초등학력을 인정해 주기도 한다.
"소통 뒷받침돼야 문해력 기를 수 있어"
지자체의 노력은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 사례가 최근 큰 인기를 끈 경북 칠곡군의 '할매들'. 군이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실에 참여한 노인들은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컴퓨터 글꼴까지 만들어 한컴오피스와 MS워드에 정식 탑재됐다.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랩에 도전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칠곡군 관계자는 "수요자 중심의 평생학습 강좌를 운영한 것이 효과를 봤다"며 "어르신들을 위한 디지털 문해력 강좌도 개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변화 속도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문해력의 의미와 개념도 수시로 바뀌는 만큼 세대갈등 등 대립 요소를 줄이려면 '소통'이 필수다. 그저 혼자 단어를 많이 알고 책만 많이 읽는다고 해서 문해력이 향상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해력 강사 강윤영씨는 "문해 능력은 타인의 의견을 듣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태도'에서 나온다"면서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이 문해력을 높이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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