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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미래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입력
2024.04.27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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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지역을 떠나고 지역으로 돌아가는 여성을 돌아볼 때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한 장면. tvN유튜브 캡처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한 장면. tvN유튜브 캡처


도시 여성을 구하는 지역 남성

몇 년 전부터 눈이 절로 시원해지는 자연 환경에 정감 있는 동네 풍경이 더해진 지역을 배경으로 도시에서 상처 입은 청춘들의 치유와 연애를 그리는 드라마가 부쩍 많아졌다. 최근 화제몰이 중인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용두리’라는 가상의 시골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뛰어난 두뇌와 외모에 복싱으로 다져진 신체까지 갖춘 남주인공 백현우(김수현 분)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요샛말로 ‘인성’인데, 이는 마음이 푸근한 가족과 이웃들로 가득한 용두리에서 성장해 자연스레 얻어진 것이다. 백현우의 사랑은 돈만 아는 도시의 재벌가에서 자란 여주인공 홍해인(김지원 분)을 구원한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재벌로 표상되는 산업화 세대의 가부장제가 무너진 빈자리를 ‘우애적 가부장제’로 대체한다.

올해 초 종영한 '웰컴투 삼달리'는 도시에서 잘나가던 여주인공 조삼달(신혜선 분)이 그동안 쌓은 커리어가 무너지는 사건을 겪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초등학교 동창인 남주인공 조용필(지창욱 분)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다. 몇 년 전 화제작이었던 '우리들의 블루스'나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성들이 지역에서 건실하게 살고 있었던 남성들을 만나 힘겹게 마음을 열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모습에 많은 시청자가 환호를 보냈다. 이쯤 되면 ‘상처 입은 도시 여성을 구하는 건실한 지역 남성’은 우리 시대 로맨스 드라마의 확고한 주인공이 된 듯하다. 어쩌다 지역 남성들은 도시 여성의 구원자로 등장하게 됐을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 지티스트·KBS 제공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 지티스트·KBS 제공


지역과 도시의 인구 구성과 젠더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고도 성장기 시절,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서울로 몰렸다. 공장과 건물, 아파트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도시는 변화와 발전을 상징하는 남성적 공간이었다. 반면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전통적인 관습이 여전히 존재하는 시골-지역은 낙후하고 정체된 여성적 이미지를 부여받았다.

저성장기인 오늘날, 도시와 지역에 부여된 젠더화된 이미지는 바뀌고 있다. 지역은 건실한 남성 청년의 모습을 내세워 다른 가능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소위 ‘지역 소멸’에 대응한다는 지자체의 프로젝트, 행사, 언론 기사가 내세우는 얼굴들을 보라. 남성 일색인 지역 정치인과 유지들, 청년 기획자와 자영업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사라져 가는 지역과 한국 사회를 구할 사명을 부여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역 사회가 실제로 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 지역민, 결혼이주민, 농업이주민은 이런 얼굴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로 가정폭력이라든가 비닐하우스 숙소 사망 등 사건 사고의 피해 당사자로 등장한다. 이들의 얼굴을 대신하는 것은 한 줄도 안 되는 신상정보다.

7일 서울역에서 KTX에서 내린 승객들이 승강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7일 서울역에서 KTX에서 내린 승객들이 승강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성’ 재현은 지역 여성 청년들의 서울 이주라는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년 11월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한 기사가 한동안 타임라인을 장식했다. ‘청년인구 집중의 핵심 키워드, 20대 여성의 상경’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제목 그대로 ‘지역소멸’의 중요한 이유인 ‘지역 청년의 서울 이주’가 ‘20대 지역 여성의 서울 이주’임을 소상히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사실 지역의 여성정책연구원들은 청년 여성들의 지역 유출에 일찌감치 주목해 왔다. 2021년 경남여성가족재단 연구보고서 ‘경남 청년여성 인구유출 대응 방안’을 필두로 지역의 여성정책연구원들은 청년 여성의 서울 이동이 지역 인구 감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경고해왔다. 이들은 원하는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모두가 서로를 아는 지역 문화에서 부자유를 느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출산 당사자인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떠나고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상처 입은 도시 여자’는 도시에서 일하고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경험을 하는 우리 시대 청년 여성들의 정서와 욕망, 판타지를 먹고 자란 캐릭터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으리라.

떠나는 청년(여성)들, 돌아가는 청년(여성)들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청년 삼달(신혜선·오른쪽)은 서울에서 고향 제주로 내려가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려 한다. SLL 제공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서 청년 삼달(신혜선·오른쪽)은 서울에서 고향 제주로 내려가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려 한다. SLL 제공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드라마에서도 여성들이 마치 최후의 보루를 찾은 것처럼 고향에서 새 삶을 찾지 않던가.

지난 4월 16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에서는 ‘청년의 이동성과 장소 선택’이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지리학자인 발표자 이현욱 교수는 그간 인구 이동을 설명해 온 이른바 생애 주기(life cycle) 관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봤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특정 시기에 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며 한 장소에 정착하는 것은 고도 성장기에나 가능했다는 것이다. 저성장기, 수명마저 길어진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동은 다양한 생애 경로(life course)를 개척해 나가는 가운데 선택되는 사건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교수가 주목하는 현상은 지역으로의 인구 유입이다. 도시로 가는 이들뿐 아니라 지역으로 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연구한 A군의 경우 최근 꽤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도시에서 일하다 지친 비혼 여성, 자녀 없는 커플, A군 출신으로 도시로 이주했다가 여러 이유로 돌아온 청년이 이들이다. 이들은 도시와 비교해 수입은 적지만 여유를 기대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고,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인생의 다음 과정을 고민하기도 하며 이주한 ‘지역민’으로서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을 활용해 새로운 벌이를 창출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다. 특히 A군 주민과의 관계는 양쪽 다 풀어야 할 새로운 숙제다. 이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주민들은 없어질지도 모르는 동네에 청년들이 들어와 활기가 도니 환영하면서도 이들을 ‘실패자’로 본다. 도시에서 문제없는 사람들이 이 동네까지 살러 올 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런 이중적 시각을 예민하게 감각한다. 안 그래도 쉽지 않았던 도시 생활의 피곤함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지역에서 환영과 의심이 섞인 시선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새로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도 자녀도 없는 여성들,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부부들이란 어떤 주민들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별세계의 외계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이들이 바로 도시로 이동했다가 돌아온 여성들이다. 이 교수는 이들이 ‘꼭꼭 숨어 있다’고 표현했다. 이웃, 가족,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기에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과의 연결이 단절된 이들은 작은 충격에도 크게 휘청이며 더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돌아간 남성들이 연고를 활용해 농사, 장사, 사업을 벌이며 지역 일꾼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은 것과 대조적이다. 돌아온 아들은 가족과 이웃이 도와줘야 할 지역의 얼굴인 반면, 돌아온 딸은 도시에서 ‘신세 망치고’ 여기까지 온 거라는 수군거림을 듣기 일쑤다. 남성 중심적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 지역에서 연고는 남성에게는 자원으로, 여성에게는 억압으로 작동한다. 이런 면에서 고향에서 새 삶을 찾는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도시로 온, 혹은 돌아간 지역 여성들의 간절한 바람이 투영된 캐릭터가 아닐까. 어떤 언론도, 정치인도, 정책도 이들을 주목한 적 없으니 드라마에서라도 위안을 받을밖에.

다양한 지역민들의 삶에서 길어 올리는 지역의 미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3 지방시대 엑스포 및 지방자치 균형발전의 날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 대통령, 우동기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 이장우 대전시 시장. 대전=서재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3 지방시대 엑스포 및 지방자치 균형발전의 날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 대통령, 우동기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 이장우 대전시 시장. 대전=서재훈 기자

모두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표준적 생애주기가 무너진 오늘날, 지역과 도시로의 이동은 ‘인구 유출입’이라는 큰 흐름과 더불어 개인들이 가진 자원, 생애 경로, 욕구라는 보다 섬세한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지역소멸’에 대한 추상적 염려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 성별과 세대의 사람들에게 삶의 장소인 지역의 구체적 현실과 결합해 실질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미래를 ‘남성 청년’에게서만 찾지 말고, 이미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처지에서 길어 올리고자 하는 시각과 의지가 절실하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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