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 소설 ‘일러두기’
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바람이 부니까 꽃술이 꼼지락거리는 듯했고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는데 그게 기가 막히게 평화로워 보였어요. 그게 떠올랐어요. 그래서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나 또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 장면 말고도 있었더라고요.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저한테도 말예요.”
조경란 작가의 단편소설 ‘일러두기’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먹고 마시고 심지어 노래할 때도” 그래 보이는 ‘미용’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부모가 낳고 싶어 낳은 아이가 아니었기에 “눈에 띄지 않는 법을 스스로 고안하고 터득”하고 평생을 움츠린 채 살아야 했던 아이였고, 성장한 이후로는 그 나이에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산다는 이유로 “여전히 석연찮은 여자”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미용은 호응이 되지 않는 문장과 틀린 맞춤법, 띄어쓰기로 자신의 인생에 관해 일기 같은 원고를 씁니다. “왜 그런 걸 쓰나”라는 이웃 ‘재서’의 질문에 미용은 자신에게 폭력을 쓴 교련 선생님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이어 “내가 쓰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다”면서 교련 시간 전 창가로 보인 복사나무 한 그루에 관해 이야기하죠. 꽃잎이 떨어지던 이 풍경은 미용을 계속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 “기가 막히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의 순간들입니다.
소설 ‘일러두기’는 올해 제47회 이상문학상 대상작이기도 합니다. 조 작가의 수상 소식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을 운영하는 문학사상 출판사가 이상문학상 매각 절차를 논의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월간지 ‘문학사상’도 이번 달부터 잠정 휴간에 들어갔죠. 경영난 때문이라는 후문에 씁쓸함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저작권 양도조항 등 불공정 계약으로 잡음도 있었지만, 1977년 제정 이래 한국 대표 문학상의 자리를 지켜 온 지난 순간들만큼은 누군가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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