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4 팬텀 전투기, 1969년 첫 도입 후 55년 만에 내달 퇴역식
헬멧 등 15㎏ 장구 착용… 기류·선회기동 영향 멀미와 사투
레이더 미사일·LGB 등 8톤 무장 탑재… 국군 첫 게임 체인저
차세대 KF-21과 합동 비행… 前 조종사 "혹사시켜 미안"
“오늘 하늘은 세븐 클리어입니다. 팬텀이 고별 순례를 하기에 딱 좋은 날씨죠.”
지난 9일 경기 수원시 제10전투비행단에서 바라본 상공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늘을 8등분했을 때 지상으로부터 7단계까지 구름이 없다고 했다. 이날 대한민국 영공을 55년간 지켜온 팬텀은 다음 달 7일 퇴역식을 한 달 앞두고 49년 만의 고별 국토순례비행에 나섰다. 그리고 그 비행에 본보를 포함, 4명의 기자단이 동행하기로 했다.
제153전투비행대대 소속의 마지막 남은 F-4E 4기 편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들이 모은 방위성금으로 1975년 구매한 F-4D 5대에 붙여준 ‘필승편대’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의 중국 방문, 베트남 공산화 등 안보 위기가 현실화하자 국민들은 부족한 국방 예산을 대신해 십시일반 방위성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163억 원 중 71억 원으로 당시 최신 전투기였던 F-4D 5대를 구입했다. F-4E는 미국의 특별군사원조로 1969년 첫 도입된 팬텀의 성능 개량형으로 공군은 현재 10대를 운용 중이며, 그중 6대가 수원 기지에 있다.
팬텀의 마지막 특급 임무… 49년 만의 국토순례비행
팬텀의 마지막 임무에 동행할 기자단은 사전 교육과 메디컬 체크를 받았다. 중력가속도에 의한 의식상실(G-LOC)을 막기 위한 G-슈트, 구명정이 달린 하네스, 산소공급과 통신장비 연결을 위한 헬멧 등 장구를 꼼꼼히 챙겼다. 장구류 무게만 약 15kg. 막중한 임무만큼이나 어깨가 무거웠다.
마치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총 8명의 조종사와 기자들이 일오횡대로 격납고를 향했다. 우리를 맞이한 건 지상 발전기를 통해 예열하며 굉음을 내고 있는 4기의 팬텀. 2기는 각각 49년 전 방위성금 헌납기의 모습을 재현한 정글무늬와 과거 팬텀기 도색이었던 연회색으로 도색했고, 2기는 현재의 진회색 바탕 도색을 했다. 기체 측면에는 ‘국민의 손길에서, 국민의 마음으로/ 1969~2024’라는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문구 양옆에는 팬텀의 고유 캐릭터인 스푸크(도깨비) 문양이 또렷했다. 왼쪽엔 '빨간 마후라'와 태극무늬를 더한 스푸크가, 오른쪽에는 조선시대 무관의 두정갑을 입은 스푸크가 위치했다. ‘스푸크’는 팬텀 최초 개발 당시 기술도면 제작자가 항공기의 후방 모습을 보고 착안해 그린 캐릭터로, 팬텀을 후방에서 바라봤을 때 마치 서양의 전통적인 유령(Phantom)과 흡사해 보여 탄생했다.
“탑승이 제일 걱정된다”고 했던 김태형 153대대장(중령)의 우려처럼 조종석에 오르는 게 만만찮았다. 왼발부터 7계단의 사다리를 오른 뒤 전방 조종석 옆 좁은 공간을 살금살금 옆걸음으로 이동, 조종석에 앉았다. 각종 결속 장비들로 기체와 신체를 하나로 묶었다. 옴짝달싹하기 힘든 상황. 헬멧 크기 때문에 머리 움직임도 제한됐다. 전방석 조종사의 지시에 따라 레이더 스위치를 ‘스탠바이’로 옮겼다.
최대 무장 8480㎏… "도깨비 위용에 짓눌린 北, 비행기 아예 안 띄웠다"
활주로를 마주한 팬텀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헬멧과 귀마개를 뚫고 거친 엔진음이 파고들었다.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8초. 10시 정각, ‘필승편대’ 고별 국토순례비행의 막이 올랐다.
이륙 후 편대는 핑거팁 대형(손가락을 붙였을 때 검지부터 소지까지의 삼각형 모양)을 유지했다. 4번기만 좌우로 기동하며 상황에 따라 레프트 핑거팁, 라이트 핑거팁 대형을 만들었다. 기체 간 간격이 불과 2, 3m. 옆 기체 조종사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편대를 이끄는 1번기엔 전·후방 조종사 모두 베테랑으로 편성됐다. 나머지 2~4번기 후방석에는 기자들이 탑승했다. 전천후 전폭기인 팬텀은 F-15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보기 드문 2인승 전투기였다. 당시 게임 체인저로 불렸던 레이더 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해, 무기통제사로 불린 후방석 조종사는 △레이더 운용 △좌표 입력 △공대지 레이저 유도 폭탄(LGB) 타기팅 등 무장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팬텀은 냉전 시기 북한의 김 주석이 가장 두려워했던 우리 군 전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레이더 공대공 미사일을 갖춰 공중전에선 무적이었고, 장착한 LGB로 지상 표적을 정밀하게 초토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팬텀 도입 전만 해도 우리 공군력은 미그 21을 보유한 북한에 절대 열세였다. 팬텀은 우리 군이 보유한 첫 게임 체인저였다.
팬텀 후방석 조종사로 830시간을 비행한 이성진 대구 제11전투비행단 부단장(대령·공사 43기)은 “공대지 미사일 팝아이를 비롯해 최대 8,480㎏이라는 어머어마한 무장을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팬텀이 떴다 하면 북한은 아예 비행기 자체를 띄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멀미와의 사투 속 되돌아본 팬텀의 활약상
이륙 후 항로에 들어서기 위해 급선회 기동을 하자 원심력에 의해 중력가속도(G)가 발생했다. 약 3G(중력의 3배)가량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그러자 G슈트에 공기가 자동으로 주입됐다. 공기압을 이용해 하체에 혈액이 쏠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캐노피(조종석 덮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원 시내가 정면으로 보였다. 기체가 거의 70도가량 왼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선회 기동 이후엔 지면과 평행하게 비행했지만, 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꾸준히 상하로 꿀렁거렸다. 레이더와 계기판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뱃멀미와 같은 이유로 속이 매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탓에 태양열은 조종석을 뜨겁게 달궜다. 4번기 전방석 조종사인 박종헌 소령은 “여름에 비행하다 보면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뜨겁다”고 했다.
모(母)기지인 수원 기지에서 이륙한 필승편대는 △굳건한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평택 △1972년 박 전 대통령 주관 F-4D 성환 비상활주로 이착륙 시범행사'가 열렸던 천안·성환 △대북 게임 체인저라는 칭호를 물려받은 F-35A를 운용하고 있는 청주 기지 △팬텀의 주요 작전 지역인 동해안 상공을 차례로 지났다. 팬텀은 냉전시대에 동해안에서 구소련 전력을 차단하며 맹활약했다. TU-16(1983), TU-95(1984) 폭격기와 핵잠수함(1984)을 상공에서 식별해 차단했고, 1998년 2월에는 러시아 IL-20 정찰기에 대한 전술조치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 포항·울산·부산·거제 등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전초기지였던 한반도 남동부 주요 도시들을 거친 필승편대는 대구로 기수를 돌렸다. 대구 기지에서 전투기엔 기름을, 조종사들은 배를 채운 후 필승편대는 ‘팬텀의 고향’ 공군 대구 기지에서 다시 날아올랐다. 대구 기지는 1969년 F-4D가 미국·영국·이란에 이어 네 번째로 도입됐을 당시 최초의 팬텀 비행대대가 창설된 곳이다.
이제는 세대교체… KF-21 보라매, 팬텀을 배웅하다
대구 기지를 떠난 지 10분. 우리 공군력의 막내이자 기대주인 KF-21 보라매 2기가 합류했다. 팬텀과 KF-21은 델타(Δ) 대형을 이뤘다. 국토순례비행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F-15K 2기는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이 순간을 촬영했다. 공군의 과거(팬텀), 현재(F-15K), 미래(KF-21)가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 장면이었다.
세 기종은 △KF-21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위치한 사천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해 있고 우주항공청이 개청하는 고흥까지 약 20분을 함께 날았다. 고흥 상공에서 KF-21은 급선회하며 이탈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복귀하십시오.” 대선배 팬텀 편대에 막내가 보내는 헌사로 들렸다. 팬텀은 이에 화답하는 축포를 쏘듯 플레어를 발사했다.
팬텀 편대는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소흑산도)를 향했다. 팬텀은 1971년 소흑산도에 출현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작전에서 활약했고, 1983년 북한 이웅평 대위가 미그-19를 몰고 연평도 상공으로 귀순했을 때 퇴로차단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가거도에서 서해를 따라 북상한 팬텀 편대는 새만금방조제와 군산 앞바다를 지나 수원 기지를 향해 마지막으로 급선회했다. 축포처럼 플레어를 터뜨리면서. 총 비행시간 3시간 26분. 오전 10시에 수원에서 이륙한 필승편대는 오후 4시 50분에 다시 모기지로 돌아왔다.
과거 유일했던 보복 응징 전력… "혹사시켜서 미안해"
착륙하고 나서야 팬텀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가 느껴졌다. 계기판, 백미러, 각종 결속 도구는 때가 타고 도색이 벗겨져 있었다. 반세기 동안 영공을 지켰던 노병은 정정했지만 희끗해진 머리는 숨길 수 없어 보였다.
팬텀과 10년간 동고동락한 장영익 예비역 공군 준장(공사 31기)은 "떠나보내는 아쉬움보다 말도 안 될 만큼 혹사당한 팬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이성진 부단장은 팬텀과의 추억으로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 실제 스크램블(비상출격)을 나선 적이 있다"며 "유사시를 대비해 손톱, 머리카락을 잘라 놓고 비장한 마음으로 출격했다"고 전했다. 팬텀은 한국형 3축 체계를 구축하기 전 대량 응징 보복(KMPR)이 가능한 유일한 전력이었다. 그래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1983) 당시 처음으로 팬텀을 활용한 보복 작전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후 KAL기 폭파사건(1987)과 연평해전 당시에도 팬텀은 가장 위험한 작전 투입을 준비했다.
팬텀은 내달 퇴역 이후 전국 곳곳에서 전시되거나, 적 세력의 유도탄 또는 각종 탐지장비들을 혼란시키고 교란하기 위한 '디코이(Decoy)'로 활주로 등에 배치될 예정이다. 박 소령은 “1975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날아오른 ‘필승편대’의 조국수호 의지는 불멸의 도깨비 팬텀이 퇴역한 후에도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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