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 라이프' K예능 화두로
'마이 네임 이즈~' 등 한 달 새 신규 프로만 2개 이상
'워크맨' 등 유튜브 유행 TV로 확산
"연예인 아니면 뭘 할 수 있을지 시도라도"
이생망 'n차 인생' 바람 맞물려
'연예인 사생활 관찰 예능' 피로 반작용
#1. "사장님, 안녕하세요". 회색 운동복에 검은색 모자를 꾹 눌러쓴 일꾼이 찾아왔다. 일터는 경기 안양시 소재 신문 유통원. 목장갑을 끼고 수북이 쌓인 신문에 일일이 광고지를 껴 넣는 게 업무의 시작이었다. 새벽 1시쯤 되자 신문을 오토바이에 싣고 인근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구독자가 사는 13층으로 올라가 신문을 반으로 포개 문 옆에 내려놨다. 문이 열릴 때 신문이 그 밑으로 끌려 들어가 찢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었다. 배우 최강희는 지난달 이렇게 직접 신문 배달을 했다. 유튜브 채널 '나도 최강희'엔 그가 야쿠르트 배달을 하고 충남 당진 장고항 바다에 배를 타고 가 시장에 내다 팔 고기를 잡는 영상이 올라왔다. CBS 라디오 프로그램 '최강희의 영화음악'을 진행 중인 그는 요즘 연예인과 '아르바이트생 최강희'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
#2. "어메이징 그레이스~". 지난 3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길거리에서 배우 박보검은 찬송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영어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거리에선 "러블리!"란 감탄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보검은 아일랜드에서 연예인이 아닌 현지 청년 A씨로 살았다. 6월 방송될 JTBC 새 예능프로그램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을 통해서다. 연예인이 사흘 동안 나이, 직업 등이 모두 다른 타인의 삶을 대신 사는 게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다.
'멀티 라이프', 회귀물 유행과 닮은꼴
또 다른 나로 사는 '멀티 라이프'는 요즘 K콘텐츠 업계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연예인들이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하거나 아예 타인의 삶에 들어가 그의 회사에 다니고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콘텐츠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9일 방송된 ENA '눈떠보니 OOO'와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 등 한 달 새 공개될 프로그램만 최소 두 개다. 방송인 장성규의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생 도전의 화제로 구독자 400만 명을 거느린 '워크맨' 등 유튜브에서 먼저 분 멀티 라이프 콘텐츠의 인기가 TV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체험 삶의 현장'(1993~2012)이 연예인들이 본업이 아닌 일에 뛰어들어 먹고살기 위한 노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멀티 라이프 소재 콘텐츠들은 타인의 일을 대신하는 걸 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에 주목한다. 이런 변화는 "이번 생은 망했어"란 말이 유행어처럼 퍼진 것처럼, 현실에 좌절한 청년 세대들이 대중문화 속 회귀물을 적극 소비하며 또 다른 삶, 즉 'n차 인생'에 대한 판타지를 키우고 있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연예인도 예외는 아니다. 데뷔 30년을 앞두고 새로운 직업 탐구에 나선 최강희는 "연예인이 아니면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고 그래서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깃집 설거지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시간당 1만 원을 받고 석 달을 일했다. '눈떠보니 OOO'로 타인의 삶 체험에 나선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 김동현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력거를 끌었다. 안제민 PD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진짜 이루어진다면?'이란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기획 의도를 들려줬다.
연예인 사생활 관찰 예능 부작용 '나비효과'
멀티 라이프를 주제로 한 예능 제작이 유행처럼 번지는 데는 연예인들 사생활 노출에 치우친 관찰 예능에 대한 피로가 쌓인 데 따른 반작용이란 해석도 나온다. 연예인의 삶을 꾸밈 없이 보여준다는 것을 미끼로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부부 생활 상담 등을 구실로 '막장 드라마'보다 더 선정적인 장면을 내보내 잇따라 논란이 불거진 데 따른 것이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리얼이라고 해도 그간 연예인 관찰 예능 프로그램들이 서민의 삶과 동떨어진 모습을 오랫동안 내보내면서 시청자의 반감을 키웠다"며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방송사나 제작사들이 연예인이 아닌 서민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소재로 멀티 라이프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연예인들은 시청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기회로 멀티 라이프 실험을 적극 활용한다. '몸값'을 높이기 위한 신비주의 전략이 예전만큼 통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멀티 라이프로 누군가의 소중하고 진지한 삶이 자칫 웃음거리로 소모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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