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43> 영주순흥 벽화고분
한국 고대사에선 여러 소국이 네 나라, 세 나라, 그리고 마지막엔 신라로 통일된다. 이 과정은 극적 장면의 연속이었다. ‘형제의 나라’였던 국가끼리 갑자기 전쟁하는가 하면, 이 전쟁 속에 왕이 전사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 과정에서 어떻게 문화적 동질성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고고학 유적ㆍ유물을 보면 세 나라는 각기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속해서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주순흥 벽화고분(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은 한반도에 정립된 세 나라가 새 문화를 확산ㆍ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또 한반도 남쪽 깊숙한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 문화 유적이기도 하고, 삼국의 ‘엇갈린 운명’에 진한 여운이 남는 유적이기도 하다.
순흥면 읍내리 가는 길
강원 원주, 충북 제천 그리고 단양으로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로 남행하다가 국내에서 2번째로 긴 죽령터널(길이 4,600m)을 지나지 않고 국도로 접어들었다. 고구려 군대가 넘었을 죽령(竹嶺)의 험한 고갯길을 한번 체험하기 위해서다.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이 고개를 넘었을 것으로 확신하는 만큼,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남북 통로로 사용된 길이다.
‘죽죽이’가 개척해 죽령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있는 죽령고개는 단양에서 오르는 구간은 여러 번 굽이친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봐도 단양 방면(북서쪽) 골짜기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까마득하다. 반면, 영주-순흥 방면(동쪽)의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길은 소백산 중턱의 희방사 마을을 지나니 바로 순흥이다. 이곳이 고대 신라 입장에서는 ‘천혜의 방어선’이었음이 쉽게 이해되는 지형 구조다.
풍기읍을 출발해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 가는 길을 따라간다. 길 중간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는데, 서원에 도달하기 직전 비봉산 산등성이에 고분 공원이 있다. 공원 내에는 이 일대에서 발굴된 거대한 석곽묘가 복원(복제 고분)돼 있다. ‘진짜 고분’은 ‘복제 고분’이 있는 공원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석곽묘에서는 신라식 출자(出字)형 장식 금동관이 출토돼, 신라 문화와 고구려 문화가 혼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죽령, 언제 신라 땅이 됐을까?
죽령이 삼국사기 신라조에 등장하는 것은 아달라왕(신라 제8대 왕ㆍ재위 154~184) 5년(158년)조이다. 그렇지만 ‘단양적성비’에서도 알 수 있듯, 신라가 진흥왕 대인 6세기 중엽 죽령 이북 10개 주를 고구려로부터 탈취하기 전까지, 죽령은 물론 소백산 이남의 경북 북쪽 지역도 고구려 영향 아래에 있었다. 지명에서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안동 도산(경북 안동시 도산면)이 고구려의 매곡현, 부석(영주시 부석면)은 고구려의 이벌지현, 순흥(영주시 순흥면)이 고구려의 급벌산군이라는 사실이 삼국사기 등 고문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사를 보면, 기원후 400년 왜의 침공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이 현재 경남 지역인 임나가라(任那伽羅)의 종발성(從拔城)까지 남쪽 깊숙이 출병해 한동안 신라에 남아 있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이때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 왕자가 신라왕을 지금의 충주에서 맞이하는 중원 고구려비(5세기 제작 추정), 신라 소지왕(제21대 왕ㆍ재위 479~500)이 사망 직전인 500년에 영주 지역을 순행하면서 ‘벽화’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연애 이야기 등을 보면, 5세기쯤엔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됐음을 알 수 있다.
희귀한 벽화 고분, 한 지역에서 2기나
무덤에 큰 방을 만들고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 고분’은 주로 고구려 고토인 평양과 황해도 일대, 그리고 만주 지역인 집안 지역 등에 집중돼 있다. 한강 이남 지역에는 지금까지 모두 5기(영주 순흥 2기, 공주ㆍ고령ㆍ부여 각 1기)가 확인됐는데, 영주 순흥 지역에서만 2기나 발견됐으니 당시 고고학자들은 대단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2기 모두 비봉산 자락에 있다. 순흥읍내리 벽화고분(사적 제313호)은 1985년 이명식 대구대 교수가 발굴했고, 앞선 1971년엔 진홍섭 이화여대 교수가 이곳에서 약 1㎞ 떨어진 곳에서 어숙술간(於宿述干)의 묘(순흥 어숙묘ㆍ사적 제238호)를 발굴했다.
어숙술간의 묘는 훼손 정도가 심해 벽화가 적다. 하지만 읍내리 고분의 네 벽에는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다. 묘 주인의 이승 생활과 저승에서의 영화를 기원하는 내용이어서 고구려 벽화 전통의 흐름을 잘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벽화 무덤’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는 소중한 유적이기도 하다.
순장(殉葬)의 흔적이 남은 공간
어숙묘(於宿墓)가 처음 발견되면서 ‘이 지역에 같은 종류의 또 다른 고분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그 후 14년이나 흐른 뒤에야 순흥읍내리 고분이 발견된 것은 당시 고고학 학문 여건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일대 고분 조사를 위해서 일생 처음으로 차를 구입했다’는 이명식 교수의 열정이 있었기에 시간을 앞당긴 셈이다. 도굴 갱을 통해 처음 고분으로 들어가 불을 켰을 때,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벽화를 발견했을 때 느꼈을 이 교수의 감동은 아마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영주순흥 고분은 자연석을 가공해 평평한 벽을 만들었는데, 벽의 위쪽은 무덤 안쪽으로 약간 좁혀가며 쌓은 뒤 그 위를 네 개의 큼직한 판석으로 덮어 천장을 만들었다. 무덤방의 동-서 길이는 353㎝, 남-북의 폭은 202㎝, 그리고 높이는 205㎝다.
입구는 남쪽으로 난 무덤길에 있고 이 무덤길은 서벽에 붙여서 만들었다. 그리고 시신을 안치한 대는 무덤방 동편으로 치우쳐서 자리 잡고 있다. 도굴꾼들이 다른 보물들은 훔쳐 갔지만, 두 사람의 뼈는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북서 모서리에는 돌을 쌓아서 만든 작은 대가 있는데, 순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 일곱 구가 있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 벽화와 함께 뼈 부스러기만 남은 시신을 봤을 때, 무덤 주인의 혼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엄습하지 않았을까.
벽화의 의미… 이승과 저승이 접하는 곳?
돌 벽면 위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곳곳에 회가 떨어져 나갔다.
서쪽 벽과 남쪽 벽의 그림은 이승의 삶을 그린 것이다. 먼저 서쪽 벽에는 담장 안에 큰 버드나무가 서 있는 큰 기와집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무덤 주인의 집인 듯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이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에 묻혔을 뿐이다.
또 남쪽 벽은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삼지창에 물고기 연(鳶)이 달려 펄럭이는 그림이 있고 그 옆에 명문이 있다. 아마도 이 무덤의 주인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또 여인의 모습이 남아 있으니, 분명 무덤 주인의 가족일 것이다.
반면, 동쪽 벽에는 산을 그리고 그 위에 태양, 그 속에 새가 활기차게 날고 있다. 아마도 그 장송새(葬送鳥)가 주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북벽에는 세 마리의 새, 연밥이 위로 솟아 있는 연화들이 그려져 있다. 또 윗부분에는 날리는 구름들이 있다. 불교적 연화정토를 상징하는 연꽃, 그리고 구름ㆍ새 등 도교적 요소가 함께 보이는 점은 진파리 고구려 고분벽화(북한 평양시 소재)에서 보이는 기법과 통한다.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서편 벽과 연도(羨道ㆍ고분 입구에서 무덤방까지 이르는 길) 벽면에 양쪽으로 그려진 역사(力士)상이다. 몸통은 붉은색으로 표현된 채 검은 모자를 쓰고 회색 잠방이를 입었다. 귀를 가진 흰머리 뱀을 손에 휘감은 채 포효하는 얼굴로 연도에서 입구를 향해 서 있다. 통구 사신총(四神塚ㆍ중국 길림성 집안 소재)의 역사상과 통하는 이 그림은 특별히 진하고 크게 그려져 있어 이 무덤을 지키는 ‘무덤 수호자’ 역할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도 붉은색 몸통에 청록색 바지를 입은 역사상이 있으니,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 시기, 누구의 무덤일까?
남벽의 연도부 위쪽 벽면에 쓰인 명문 ‘기미(혹은 해)중묘상인명OO’(己未(亥)中墓像人名OO)으로 미뤄, 고분 조성 시기는 기미년인 539년이나 기해년인 519년, 579년 등을 유력한 연대로 추정하지만, 묘주의 이름은 박락(剝落)돼 알 수가 없다.
다만 ‘벽화 고분'은 고구려의 유력한 인물이 아니면 조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지역이 고구려 지배권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신라 소지왕 시절, 즉 481년 이후부터 진흥왕이 죽령 이북으로 진출하는 6세기 중반까지 이 시기 ‘고구려 유력자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벽화 외에는 고구려적인 유물이 이 지역 고분에서 보이지 않는 점 △무덤 입구 역사상이 고구려벽화에는 없는 귀걸이를 하고 있는 점 등을 토대로 ‘신라화’된 벽화라고 보기도 한다.
여하간 이 벽화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 등 고구려가 한반도 내 정치 판도를 뒤흔들던 격동의 시기에 한반도 남쪽에 들어온 고구려 문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유적이다. 그러나 결국엔 후발 주자인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가 어떤 철학과 전략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지 않았나. 이 작지만 미스터리한 고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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