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남성 지배' DJ 세계에서 성공하기까지...
"온갖 공격, 이젠 즐길 수 있는 경지...
누가 날 욕하는 건 내가 잘하고 있단 뜻이죠"
DJ 10여 년 만에 첫 정규앨범 '아이 히어 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 한국어로 가사 써요"
영국 BBC 라디오 선정 올해 가장 유망한 음악인 3위. 한국 음악가 최초 영국 브릿어워즈 2024 '인터내셔널 송' 부문 후보, 유명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전문지 'DJ 맥' 선정 2023년 DJ 톱100 중 여성 최고 순위이자 전체 9위.
페기 구(33·본명 김민지)가 현재 세계 대중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설명해 주는 수식어들이다. 방탄소년단(BTS)이나 블랙핑크 같은 K팝 스타 만큼이나 지금 세계 팝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한국 음악가인 그가 내달 7일 첫 정규 앨범 '아이 히어 유'(I Hear You)를 발표한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잠시 고국을 찾은 페기 구는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해 제겐 신경안정제 같은 분들이 있어서 한국에 오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와서 피부 관리도 받고 음악이나 패션계의 새로운 창작자와 브랜드를 소개받는데, 뇌가 쉴 수 있어서인지 누구를 만나고 뭘 하든 항상 영감을 받는다"고도 했다.
앨범 곳곳에 '한국인 정체성'... "한국어로 노래할 때 가장 나답죠"
'아이 히어 유'는 페기 구가 DJ로 첫 공연을 한 지 10여 년 만에 처음 내는 정규 앨범이다. 자작곡 '흥부'(Hungboo)를 처음 발표한 지 8년 만이다. "완벽주의자 기질이 심해 발매가 2년 정도 늦어졌어요. 음악가이기도 하지만 DJ로 시작했기 때문에 앨범이 중요하다곤 생각하지 않기도 했고요. 처음엔 디제잉하면서 함께 틀 내 노래 몇 곡만 있으면 되지 않나 싶었죠. 그러다 내 노래를 사람들이 따라 부르는 걸 보면서 음악가의 길을 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8년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지난해 첫 싱글로 발표된 '(잇 고즈 라이크) 나나나'((It Goes Like) Nanana)는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5위에 오르며 세계적 히트곡이 됐다. "전에는 저를 안 다음에 제 음악을 알게 됐다면, '나나나' 이후론 제 음악을 먼저 알고 난 뒤 저를 알게 된 분이 많아졌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를 실감했단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몸값도 급등했다. 지난달 두 차례의 공연을 치른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 이어 영국 글래스턴베리,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일본 후지록페스티벌 등 대형 페스티벌에 선다. 올해 7월 27일 서울로 잠시 돌아와 '보일러룸 서울 2024'에선 국내 팬들도 만날 예정이다.
1990년대 하우스(EDM의 한 장르) 음악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번 앨범에는 10곡이 실렸다. '나나나'처럼 처음 들어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친근한 곡도 있고, 미국 팝스타 레니 크래비츠가 참여한 '아이 빌리브 인 러브 어게인'(I Believe In Love Again)처럼 보다 팝에 가까운 음악도, 언더그라운드 성향의 곡도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로 노래할 때 가장 나인 것 같아서" 한국어로 종종 가사를 쓰는 그는 이번 앨범에도 곳곳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남겼다. '아이고'(I Go)는 우리말 '아이고'와 같은 발음의 언어유희를 쓴 곡. '서울시 페기구'는 실제 가야금 연주를 사용해 우리 전통 음악을 댄스 비트에 녹여냈다. 수록곡 중 BPM(분당 박자 수)이 150으로 가장 빠른 곡인데 서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팬들이 장난스럽게 붙여준 이름을 제목으로 썼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페기 구가 'DJ 겸 프로듀서'였다면 이젠 순서를 바꾼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전세기를 타고 다니며 24시간 동안 3개 국가에서 공연했을 만큼 1년 내내 투어에 매진했던 그는 번아웃 직전까지 갔다가 팬데믹으로 모든 공연이 취소된 뒤에야 비로소 건강이 우선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당시 집에 머물며 90년대 음악에서 위로를 찾았고 그 결과 히트곡 '나나나'와 새 앨범이 탄생했다.
페기 구의 '깡'... "날 무시해? 그럼 다른 걸로 증명해 줄게"
페기 구의 성공 스토리 뒤엔 멘사 회원이자 영재인 오빠와 달리 하란 건 안 하고 하지 말란 것만 하는 괴짜 딸에게 "영어라도 배워서 교사가 돼라"며 영국에 보낸 부모의 지원이 있었다. "나갔다 하면 새벽에 돌아오니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던 어머니는 영국에서 패션을 공부한다던 딸이 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것을 애써 말리지 않았다. 디제잉으로 음악을 시작한 건 DJ였던 첫 남자친구의 영향도 있었다. "나 자신을 꾸미는 것과 남을 꾸미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걸 깨달은 그는 스타일리스트의 꿈을 일찌감치 버리고 음악을 택했다. 낮엔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클럽에서 디제잉을 어깨 너머 배우는 '주경야독' 끝에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 중 하나인 독일 베를린 베르크하인에서 공연한 첫 한국인 DJ가 됐다.
백인 남성들이 지배하는 DJ의 세계에서 한국 출신 여성 DJ가 인정받기까진 오랜 시간이걸렸다. "누가 너의 레코드를 사겠어?" "넌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같은 악담을 들으며, 인종차별과 성차별, 온갖 시기와 질투, 헛소문을 이겨내고 그는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 DJ로서 음악가로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잠시 '기린'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남다른 패션 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전엔 너무 차별과 무시를 당해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느낀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겐 연료가 됐어요. '네가 나를 무시했어? 그럼 다른 걸로 증명해줄게' 하고 생각했죠. 잘되면 잘될수록 공격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억울한 소문에 휘말리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맞다 보면 맷집이 강해지니까. 이젠 즐길 수 있는 단계까지 됐어요. 누가 날 욕한다는 건 '네가 잘하고 있다는 뜻이야'라고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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