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정치권 십자포화에 "유해성 확인된 것만 차단"
19일 정부가 '국내 안전 인증(KC인증)을 받지 않은 경우 해외 직접구매(직구)를 금지하겠다'고 방침을 발표한 지 사흘 만에 거센 비판 여론을 못 견디고 사실상 철회했다. 대책 발표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현실도 모르는 설익은 정책이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여당 주요 인사들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정부는 "혼선을 드려 죄송하다"면서도 국민 건강에 영향이 큰 80개 품목의 해외 직구 수입품은 집중 조사 후 "위해성이 높은 제품만 차단하겠다"고 했을 뿐 관련 법을 만들지, KC 인증 외 다른 인증 방안을 마련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해 당분간 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80개 품목에 대해 사전적으로 해외 직구를 차단·금지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정부는 이런 대안을 검토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전 규제'였던 해외 직구 대책은 사실상 '사후 조치'로 방향이 바뀌었다. 위해성 조사 대상인 80개 품목 중 위험하다고 판단된 제품만 직구를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발암가능 물질이 국내 안전 기준치 대비 270배 초과 검출된 어린이용 머리띠, 기준치를 3,026배 초과한 카드뮴이 검출된 어린이용 장신구 등과 같이 기준치를 훨씬 뛰어넘어 위해성이 확인된 특정 제품만 반입을 못한다. 조사 결과는 통합 해외직구 사이트인 '소비자 24'를 통해 곧바로 결과를 알린다는 계획이다. 소비자들이 기존에 해외 직구로 샀던 제품들도 원래대로 해외 직구 사이트를 통해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 같은 물건 4배 비싸게 사나" 비판 여론 들끓자 '사후 조치'로 선회
위해성 조사 결과 문제가 없는 품목은 이전처럼 구입할 수 있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다. 80개 조사 대상 품목에는 어린이가 사용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한 제품, 화재 등 사고 발생이 우려되는 일부 전기·생활용품, 유해 성분 노출 시 심각한 위해가 우려되는 생활화학 제품 등이 있다.
정부는 직구 제품의 위해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철저히 검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차장은 "80개 품목에서 집중적으로 제품 범위를 더 넓혀가면서 적발이 안 된 제품이 확인되면 어떻게 해서든 차단할 것"이라며 "국민 안전을 위해 위해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알려드린다는 게 정부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 차장은 "위해성 없는 제품의 직구는 막을 이유가 없고 막을 수도 없다"며 "해외 직구 이용에 대한 국민의 불편이 없도록 법률 개정 과정에서 국회 논의 등 공론화를 거쳐 합리적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해외 전자상거래 업체(이커머스)가 판매하는 유아용품에 발암물질이 검출되는 등 안전 우려가 커지자 우리 정부는 16일 KC 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은 해외 직구를 원천 차단하는 대책을 내놨다. 당시는 관세법을 근거로 6월 중 반입 차단을 시행하고 법률을 개정하겠다고까지 했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한다"며 비판이 쏟아졌다. 컴퓨터 하드웨어 커뮤니티 '퀘이사존'에는 "해외에서 1만 원 하는 부품을 국내에서 4만 원은 주고 사게 됐다" "소비자들이 직구를 찾는 근본 원인인 국내 유통 구조는 바꾸지 않고 규제만 한다"는 불만이 나왔다. 배터리나 충전기 등 전자 제품을 직구로 이용했던 전자기기 마니아들도 이번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맘카페 등을 중심으로 유아용품을 해외 직구로 많이 구입하는 부모 반발이 거셌다. 맘카페에서는 "수입 제품이 중국만 있는 것도 아닌데 미국이나 유럽 인증은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KC 인증만 인정하는 거냐" "국내에 유통이 안 되는 유모차를 해외 직구로 싸게 사는데 그건 왜 막냐" "애들 옷 절반 정도를 해외 직구로 이용하는데 어이가 없다" "국내 유아용품은 너무 비싼데 선택권을 제한한다" "저출생에 역행하는 규제" 등 성토가 쏟아졌다.
규제 반대 국민동의 청원도 나왔다. 한 청원인은 '해외 직구 자유를 보장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정부는 안전을 이유로 수많은 제품의 해외직구를 금지하려 하지만 국민 스스로 위험을 평가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다"며 "국민을 과보호한다면 이는 국민 자유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청원인은 "해외 직구 관련 법 개정은 소비자에게만 부담을 전가하고 경쟁력 없는 업체들을 보호하는데 그친다"고 지적했다.
추가 인증 제도 마련 여부 등 혼란 남아
회원 약 5,700명의 다이캐스트 모형(주물 공법으로 만든 모형) 수집 동호회 카페에서는 이미 해외 플랫폼에서 예약 구매한 물건을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봉제 인형 구매가 취미인 이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관세청에 물어보니 인형은 완구류에 들어가서 규제 품목이고 물품 권장 연령대는 상관없다고 하는데 직구가 불가능해지는 거냐"고 토로했다. 가령 같은 피규어라도 성인용 제품은 단속 대상이 아니지만 만 13세 이하 사용 제품은 위해성이 확인되면 제품 반입이 차단된다는 얘기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도 SNS를 통해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 여론에 정부가 기존 방침을 사실상 철회했지만 몇몇 쟁점 분야에서는 명확한 후속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김상모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제품안전정책국장은 "KC 인증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므로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쳐 관련 법 개정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겠다"며 KC 비인증 제품의 수입 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그러나 KC 인증 말고 다른 방법을 묻는 질문에 "축적된 데이터와 자료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안전성 문제에 대해 손 놓고 있기에는 여론이 너무 안 좋아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빠르게 결정을 내린 것 같다"며 "해외 플랫폼과 국내 업체의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좀 더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세청 등 관계부처들이 통관 절차 등에서 위해성 검사를 실시 중이어서 사실상 기존 정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모 제품안전정책국장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국민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만큼 여론을 충분히 모으며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며 "소비자 단체 협조를 통해 해외 직구 사이트 모니터링 실시, 알리·테무 등 플랫폼 안전 관리를 위한 국제 공조 등 가능한 모든 대안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