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 가"
△국제정세 △디테일의 악마 △관료 불신 취약점도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유일한 정답이란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전략을 짰고 이를 이행했는지를 이해하고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길로 나아가 달라는 것입니다.”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 연세대 연희관에서
20일 만난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날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외교안보편)'의 대담자이기도 합니다. 문 전 대통령이 책 서론에 밝힌 "문재인 정부가 이룬 일과 못한 일의 의미와 추진 배경, 성공과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성찰"하기 위해 대담자인 최 전 차관을 찾았습니다.
그의 의도와 달리 정치권에서는 '김정은 대변인', '몽상가적 자기합리화'라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졌습니다. 이에 대해 최 전 차관은 "이념적으로 틀어서 이슈를 만들고 정쟁화하는 건 아니지 않나. 좀 더 성숙한 토론을 기대하면 과욕이냐"며 갑갑함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문재인 정부 5년 중 4년(2017~2018년, 2021~2022년)과 윤석열 정부 1년(2023년~현재) 간 외교안보 이슈를 취재했습니다. 이 때문에 회고록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당시 취재 현장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정부 핵심인사들이 남기는 회고록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과거의 기록과 기억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고서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왜 '북한식의 비핵화'를 추진했을까
2018년 6월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는 비핵화보단 '새로운 북미관계'와 '신뢰구축'을 앞세운 합의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실제 북미 정상합의에서 비핵화는 제3항에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언급돼 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이 합의안에 대해 "실망스러웠다"며 "미국 측에서 협상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는데요. 문 전 대통령은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와 동창리 시험장 폐쇄를 중요 '선제조치'로 높게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에서조차 '수 주 또는 수개월 안에 복구 가능한 일시적 조치'라고 내부적으로 판단한 상황이었습니다. 2019년 10월 8일 박한기 합참의장이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같이 말했다가 청와대에서 일침을 가하기도 했죠. 그런데도 이를 북한의 '비핵화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최 전 차관은 "북한의 선제조치를 두고 각설이 있다는 건 잘 안다"며 "당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중이었다. 비핵화를 논할 때마다 일각에선 검증을 받아라, 모든 핵을 리스트화해서 내놓아라 하지만, 그렇게 요구해서 내놓을 수 있는 상응조치는 무엇이 있었나"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어 "핵을 내놔야 하는 대상은 북한인데, 일단 비핵화 협상테이블로 견인하려면 북한이 원하는 방식, 할 수 있는 단계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는 정상들의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영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북한을 현실적으로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려면, 일각에서 '쇼'라고 비하하는 행위들도 비핵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쇼를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로 점진적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외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북한식 비핵화' 접근 견인 위한 대일외교는 불가능했나
북미 싱가포르 합의가 이뤄졌을 때, 여러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식 비핵화 접근법'을 수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죠. 이는 결국 하노이 회담 결렬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이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한일관계 악화국면에서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방해했습니다. 이 '방해공작'은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의 또 다른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는 바꿔 말하면 일본 또한 우리가 관계 개선을 추구해야 할 외교 상대라는 의미가 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대북제재 무력화 움직임에도 한러관계를 관리하며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한 최근 윤석열 정부의 행보처럼 말이죠.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택한 대일외교는 '대결구도'였습니다.
최 전 차관은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대일외교는 일관되게 '투 트랙 외교'였다"며 "이를 원 트랙으로 끌고 가 신뢰를 깎아먹은 건 다른 곳도 아닌 일본"이라고 힘줘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교는 국민의 자존감과도 상관이 있다. 정작 스텝이 꼬인 건 일본인데, 이슈를 섞어서 대응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 게 대통령의 인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일본의 수출통제에 반발해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하자 길길이 날뛴 것은 일본이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의 이례적인 압박외교에 한국은 결국 지소미아 종료를 철회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수출규제는 여전했습니다. 최 전 차관은 이에 대해 "왜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며 서운함을 내비쳤습니다. 한국을 공격한 건 일본인데, 미국도 한일 문제 해소를 위해 나섰어야 했다는 것이죠.
최 전 차관은 "한반도 평화는 미국 없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지만, 한미동맹은 우리 국익을 돕는 것이지, 동맹 자체가 국익인 것은 아니다"라며 "지난 5년간 '한반도 평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통령과 국가안보실장과 실무진들, 비서관 한 명 한 명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원팀으로 움직였다"고도 회고했습니다.
△국제정세 △디테일의 악마 △관료 놓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건 더 이상 정책을 추진할 명분도, 동력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진보 진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의 선의에 기대 순진하게 대응했다가 실패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죠. 결과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지 못해 감당해야 할 후과가 너무나 컸습니다.
최 전 차관은 "회고록의 키워드는 절치부심"이라며 "그래도 모두가 원팀으로 이뤄내려고 했던 성과들이 (정권교체로) 단절돼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당시의 성과와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정책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밝혔습니다.
사실 보수와 진보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한미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미동맹은 제도화돼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 세력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국제정세를, 보수 세력은 국제정세를 고려한 나머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고록을 읽으면서 의아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비핵화 협상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변수들이라 할 수 있는 △국제정세 △디테일의 악마 △관료들의 움직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2017년 트럼프라는 이례적인 미국 대통령의 등장과 이를 계기로 시작된 미중 패권갈등의 격화, 그리고 합의됐던 국제규범과 질서의 붕괴는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급변하는 정세를 이해하면 왜 '스냅백(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제재 복원) 조항을 전제로 한 대북제재 해제', '북한식 비핵화의 수용' 등이 불가능했는지도, 일본의 쩨쩨함에도 우선 타협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비핵화와 상응조치라는 단어 속에 내포된 디테일의 악마를 이해했다면, '성공 시나리오'보다 '실패 시나리오'를 준비해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책 실현의 행위자들인 '관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들을 단순히 '적폐' 또는 '파국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면 잡음을 최소화하고 보다 촘촘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실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친 중재 역할은 미국이 북한과 일방적인 딜을 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
"향후 전개될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처하려면 우리는 트럼프 외에 강성 관료, 공화당, 민주당과도 중층적인 협의채널을 운용해야 한다."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 '한국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는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행과정에 대해 이같이 제언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변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국제정세와 관계를 이용했다면, 디테일과 관료들의 움직임을 좀 더 신경 썼다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진영화된 국제환경 속에서 더 이상 유의미한 접근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2017년 '한반도 전쟁설'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바꾸기 위해, 현상유지를 우선시하는 주변국들의 틈에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정부의 문제의식과 접근법은 우리가 배우고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재인 정부보다 성숙한 외교정책을 펼치기 위한 '성찰'의 시작일 것입니다. 회고록을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참으로 쓰라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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