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부남해변과 소한계곡
고성에서 삼척까지 여름휴가지로 강원 동해안이 첫손에 꼽히는 이유는 맑고 푸른 바다와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흘러내리는 깊고 서늘한 계곡 덕분이다. 삼척만 해도 케이블카와 투명 카누를 즐길 수 있는 장호해변, 바다색이 유난히 예쁜 갈남해변, 해안 절벽으로 이어진 초곡항 바다 산책로 등 명소가 수두룩하다. 석회암 동굴이 몰려있는 대이리동굴지대, 울진과의 경계인 덕풍계곡도 인기 피서지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해변과 계곡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침내’ 탕웨이 쓰러져간 부남해변
삼척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부남해변이 있다. 오래전부터 삼척의 ‘숨겨진 해변’으로 소문이 나 알음알음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막상 입구에 도착하면 철조망에 막혀 헛걸음을 하기 일쑤였다. 2022년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탕웨이가 가뭇없이 사라져간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며 다시 한번 관심을 받았고, 해수욕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민들의 건의도 꾸준히 이어졌다. 영화의 명대사처럼 ‘마침내’ 철조망이 제거된 것도 그즈음이다.
부남해변은 지형상 접근이 쉽지 않다. 좁은 마을 골목을 지나 내리막길 끝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해변까지는 좁은 계단으로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입구의 경고문이 여전히 섬찟하다. ‘군 사격장으로 폭발물 및 불발탄에 의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아직도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만 개방한다.
해변으로 내려서면 낮은 바위산이 수평선을 가로막고 있다. 주름지고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에 키 작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뿌리내리고 있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기품이 있어 사뭇 이국적이다. 갯바위 가운데에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당집이 자리 잡고 있다. 투박한 돌덩이로 울타리를 둘렀는데, 바깥으로 또 아기자기한 갯바위와 그사이를 파고든 바닷물이 그림 같은 풍광을 빚는다.
해변은 이 바위산에서 북측으로 아담하게 휘어진다. 삼척시 기록에는 길이가 300m라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해변으로 밀려왔던 파도가 둥글게 포물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금세 모래 속으로 흔적 없이 스며든다. 물기 머금은 해변을 걸으면 발등까지 폭폭 빠진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고,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다.” 영화 속 박해일의 대사가 이 장면을 묘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환희와 실망, 설렘과 두려움, 충만과 허무함. 갯바위와 어우러진 자그마한 해변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감정을 두루 품은 듯하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만큼 편의시설이 전무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드넓은 해변에 봉긋한 봉우리, 덕봉산
부남해변에서 북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삼척에서 가장 긴 맹방해변이다. 남측의 덕산해변과 합하면 4㎞에 이르러 ‘명사십리 해수욕장’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도 금단의 땅이 있었다. 맹방해변과 덕산해변 사이에 봉긋하게 솟은 덕봉산이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군사 경계 시설이 들어서며 53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가 2021년 해안생태탐방로를 개설하며 개방됐다.
눈부시게 새하얀 모래사장 사이 초록 봉우리라 한층 돋보인다. 깊은 산골에서 흘러내린 마읍천이 봉우리를 감싸니 금상첨화다. 모양이 워낙 특출해 다양한 전설을 품고 있다. 양양에서 '삼형제산'이 떠내려왔는데 첫째가 이곳 덕봉산, 둘째는 삼척 원덕읍 해망산, 셋째는 울진 비래봉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탐방로는 양쪽 해변에서 외나무다리로 연결된다. 꼭대기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주변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터널을 이루고 있다. 밤마다 소리 내 울었다고 자명죽(自鳴竹)이라 하는데, 조선 선조 때 홍견이라는 인물이 자명죽으로 화살을 만들어 무과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꼭대기에 오르면 좌우로 하얀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있다. 발아래 검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서늘한 바람이 끊임없이 봉우리를 넘는다. 대숲이 밤마다 울음소리를 냈다는 게 과장은 아닌 듯하다. 봉우리를 한 바퀴 돌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도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웃에게 내어준 천국의 계단, 나릿골 감성마을
맹방해변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삼척 시내로 접어든다. 바닷가 언덕배기 오래된 마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삼척항(옛 정라항)이 활성화될 무렵 어업에 생계를 의존하던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자연마을, 나릿골이다. 2018년 도시재생사업을 마무리하며 요즘은 ‘나릿골 감성마을’로 부른다.
대부분의 집들이 마당과 골목의 구분 없이 언덕배기 경사지에 층층이 어깨를 맞대고 지어졌다. 안내도에는 희망길, 추억길, 바람길, 바닷길로 구분해 마을 산책로를 표기해 놓았지만, 사실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도 상관이 없다. “남의 집 마당을 지나가도 돼요. 다 연결돼 있어요.” 주민의 말처럼 골목은 애초에 그렇게 생겨났다. 길은 갈라졌다 합쳐지고 좁은 계단을 따라 윗집으로 이어진다. 이웃에게 기꺼이 마당을 내어주고 길을 터주어야 유지될 수 있는 구조다. 독불장군은 불가능한 삶의 지혜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주황색 계열로 통일한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정겹게 내려다보인다. 골목 겸 좁은 마당에는 크고 작은 고무 다라이가 놓여 있다. 상추 쑥갓 파 등 반찬거리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더러는 콘크리트에 뿌리내린 대추나무 감나무가 햇볕을 가리고 사생활을 보호한다.
마을이 끝나는 언덕배기 능선은 공원으로 조성됐다. 황금사철과 홍가시나무로 색을 입히고 구획한 화단에 온갖 종류의 꽃을 심었다.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뱃머리를 형상화한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오랫동안 주민들의 삶터였던 포구가 아늑하게 내려다보이고, 바깥 바다로 검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마을과 공원 곳곳에 사진 찍기 좋도록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7080 감성으로 느긋하게 돌아보기 좋은 마을이다. 인근 오십천변에 삼척장미공원이 있다. 축제는 지난 22일 막을 내렸지만 꽃향기는 여전하다. 6월 초까지는 만개한 장미를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유일 민물김 자생지 소한계곡
맹방해변에서 산자락으로 약 4㎞ 들어가면 소한계곡이 있다. 연평균 수온이 13도 안팎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계곡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물김이 자란다.
홍조류인 바다김과 달리 녹조류 민물김은 석회암 지대 용천수가 흐르는 곳에만 서식한다. 약알칼리성의 차가운 물이 빠르게 흐르는 계곡에서만 자라는 서식 환경이 까다로운 식물이다. 국내에서는 함경남도 문천군 지선리, 영월 막골계곡에서도 발견됐는데 문천은 북한 땅이라 현재 확인이 어렵고, 영월 서식지는 1960년대 물길이 바뀌는 바람에 사라지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민물김이 자생하는 곳은 소한계곡이 유일하다.
민물김 증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계곡 초입 민물김연구센터에서는 실내의 플라스크에서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야외 실험실에서 김발에 계곡물을 흘려 재배하기도 한다. 계곡에서 자생하는 민물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곡류 부분 바위에 녹색의 수초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얼핏 이끼처럼 보이지만, 빠른 물살에 가늘게 잎이 떨린다. 실제 김을 따서 펼쳐보면 나뭇잎 모양을 띠는데 최대 10㎝까지 자란다고 한다.
민물김연구센터 김동삼 박사는 아직 생산량이 많지 않아 식용으로 판매하기는 어렵고, 민물김 성분이 함유된 비누나 마스크팩 등을 일부 생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는 봄 가뭄이 없고 수량이 풍부해 예년보다 많은 13kg을 수확했다고 한다.
연구센터에서 약 700m 생태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전체가 생태경관보존지역이어서 냇물에 발을 담글 수는 없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서늘한 냉기를 뿜고 있다. 일부 구간에 덩굴식물로 터널을 조성해 놓았고 주변에 맥문동, 기린초, 금낭화, 은방울꽃, 도라지 등 화초를 심어 계절 따라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옛날 집터였던 듯 탐방로에 뽕나무와 고욤나무가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벤치에 앉아 청량한 물소리 들으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길이다.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서 초당굴까지 희미하게 산길이 나 있다. 계곡 상류 암자까지 연결된 가파른 길로 20분가량 걸어야 한다. 초당굴 입구는 쇠창살로 막아 놓았는데, 굴속에서 솟아난 용천수가 물줄기를 이루며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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