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매주 출판 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100권이 넘는 신간이 쌓입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본문을 한 장씩 넘기면서 글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를 읽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출판 기자가 활자로 연결된 책과 출판의 세계를 격주로 살펴봅니다.
어느새 한 뭉텅이의 시간이 흘러 달력은 6월을 가리킵니다. 한 해가 절반 언저리를 지난 이번 주에는 대형 서점들이 상반기 베스트셀러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집계를 종합하면 상반기 가장 많이 읽힌 책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남긴 확신의 인생 조언을 정리한 책은 상반기 내내 종합베스트셀러 10위권(예스24 집계)에 자리했고,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2위, 인문 분야 1위를 차지했습니다. 쇼펜하우어 어록을 모은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도 각각 인문분야 4위와 6위에 올랐고요. 왠지 모를 기시감에 씁쓸해집니다. 지난해 '세이노의 가르침', '역행자' 등 인플루언서 구루들이 일으킨 자기계발서 열풍이 고전 철학계열 구루로 대상만 바꿔 옮겨간 것 같아섭니다.
"여러분에게 사는 법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나이, 직위, 학력, 지위, 성별, 재산, 직책에 관계없이 무조건 조심하라. 여러분의 생명이 죽음을 향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척도에 따라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어떤 전문가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을 거부하라."
폴란드의 심리학자 토마시 비트코프스키의 신간 '인생에 대해 조언하는 구루에게서, 도망쳐라, 너무 늦기 전에'에 나온 대목입니다. '폴란드 회의주의 클럽'을 창립할 정도로 열정적인 회의주의 활동가로 알려진 저자는 책에서 문화 트렌드에 편승한 유행, 가짜, 사기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우리가 별 의문 없이 따랐던 자기계발서 일색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펀치를 날리고 싶어졌습니다. 독서야말로 세상사를 일면적으로 해석하는 동기 부여 연사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일진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한두 명의 구루를 맹렬히 쫓고 있을 뿐입니다. 진짜 '갓생'을 살기 위해선 가장 안전해 보이는 '갓생 교과서' 목록에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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