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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신인 시절 유일한 우군"… 윤흥길 작가를 교단서 문단으로 불러낸 한국일보

입력
2024.06.07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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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문학 人 한국일보] (2) 소설가 윤흥길
‘한국일보 창간 70주년에 부쳐’ 기고
인생 바꾼 신춘문예 당선, 13개월 소설 연재도
창간 100주년 맞길… 후손들이 축하 대열 동참할 것

편집자주

한국일보는 1954년 창간 연재소설 염상섭의 ‘미망인’을 시작으로 이듬해 문을 연 신춘문예, 한국일보 문학상 등으로 늘 문학계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많은 곡절을 겪고 격랑을 넘어온 한국문학의 기록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한 한국일보가 귀한 글로 신문을 빛내준 문우(文友)들과 창간 70주년의 기쁨을 나눕니다.

윤흥길 작가. 문학동네 제공

윤흥길 작가. 문학동네 제공

벽지 분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창작에 매달리려면 밤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오랜 중노동 끝에 단편소설 두 편 완성한 것으로 그해의 신춘문예 농사를 마감하려 했다. 두 군데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지친 심신을 추스르는 참인데, 한국일보 1면에 난 사고(社告)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더 많은 문학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신춘문예 응모 마감을 일주일 연기한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상금 액수도 다른 신문사들보다 두 배 가까이 인상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때부터 또다시 원고지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며칠 죽살이친 끝에 가까스로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을 탈고해서 한국일보사로 우송하자마자 나는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져버렸다.

1967년 크리스마스 무렵, 변산반도에는 유례없는 폭설이 내려 하루 두 차례 분교장 근처를 지나가던 교통편이 그나마 끊겨버렸다. 방학인데도 집에 못 가고 분교장 옆 자취방에 누워 몸살감기와 싸우는 참인데, 뜻밖에도 동료 교사가 찾아왔다. 밖에 손님이 와 있으니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여고 재학 중인 막냇누이였다.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에 선 채로 배시시 웃으며 누이가 노란 전보 쪽지를 내밀었다. 한국일보사에서 우리 집으로 보낸 신춘문예 당선 통지서였다. 희소식 전할 일념으로 어린 누이가 시외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어찌어찌 곰소항까지 온 다음 거기서부터 분교장까지 눈밭을 헤치고 먼 거리를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1984년 3월 자신의 단행본 ‘에미’를 들고 있는 윤흥길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4년 3월 자신의 단행본 ‘에미’를 들고 있는 윤흥길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춘문예 당선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그 감격을 되씹고 곱씹으며 오늘날까지 나이를 더끔더끔 먹어 온 셈이다. 한국일보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난생처음 양복점에서 양복과 외투 일습을 맞춰 입고 시상식에 참석하러 한국일보 사옥을 방문했을 때 편집국 벽면에 큼직하게 써 붙인 ‘텔레타이프의 고장은 특종의 신호다!’라는 표어가 지금도 강렬한 그림으로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1968년 2월, 한국일보 중학동 4층짜리 사옥이 화재로 전소되고 사망자가 여럿이나 나오는 끔찍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편집국의 그 인상적인 표어도 당연히 사옥과 함께 불타 없어져 버렸다. 문화부 기자들하고 이렇다 할 친분도 없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한국일보 출신 작가로서 몹시 놀라고 당황했을 그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도리일 듯싶어 시상식이 끝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촌놈이 다시 상경길에 올라 임시 사옥을 찾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당시의 내 심정은 아마도 친정에 닥친 불행 앞에 어찌할 바 모르는 며느리의 심정 바로 그것과 어금지금한 종류였으리라.

2003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을 심사하고 있는 소설가 윤흥길(왼쪽부터)과 김윤식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배우한기자

2003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을 심사하고 있는 소설가 윤흥길(왼쪽부터)과 김윤식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배우한기자

소설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을 품고 신인 시절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로 아예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서울은 기대했던 만큼 나한테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현실의 벽에 막혀 늘 외롭고 기죽어 지내는 세월이었다. 춥고 배고프던 그 시절, 한국일보만이 내 유일한 배경이자 우군이었다. 발표 지면을 못 잡아 애먹는 나에게 ‘주간 한국’의 지면을 내주기도 하고, 한국일보와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자주 맡기는 등 지명도를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제15회 한국창작문학상(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는가 하면, 13개월 동안 연재소설 ‘청산아, 네 알거든’을 실어주는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윤흥길 작가의 장편소설 ‘청산아, 네 알거든’의 연재 시작을 알리는 1983년 12월 8일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흥길 작가의 장편소설 ‘청산아, 네 알거든’의 연재 시작을 알리는 1983년 12월 8일 한국일보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토록 국내 굴지의 언론사로 번창하던 한국일보가 그동안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세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적마다 혹시라도 과거의 명성에 금이 갈까 봐 남의 일 같지 않게 걱정이 앞서곤 했다. 내 유일한 배경이자 우군인데 그게 어찌 남의 일이겠는가. 친정 일이 잘되어야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도 기를 펴고 사는 법이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그새 경영에 안정을 되찾은 한국일보가 어느덧 창간 70주년을 맞이했다고 한다. 희수(稀壽)를 맞은 한국일보에 축하의 말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낸다. 창간 당시의 그 새파랗던 청년의 기백을 되찾아 직필과 정론을 펼치는 신문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창간 100주년을 맞는 날이 오기를 충심으로 빌어 마지않는다. 물론 그때는 내가 세상에 없을 테지만, 내 후손들이 한국일보와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면서 100주년 축하 대열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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