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 야경 명소
대중가요 ‘신라의 달밤’은 가수 현인이 1949년 부른 노래다. 불국사의 종소리,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도 나온다. 금오산은 산 전체가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3절 가사는 좀 낯설다. ‘대궐 뒤에 숲속’ ‘아름다운 궁녀들’이 등장한다. 짐작건대 그때까지 제대로 가치가 알려지지 않은 월성, 계림, 동궁과 월지 등 신라의 궁터를 뭉뚱그린 것으로 보인다. 2001년 영화 ‘신라의 달밤’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왔던 고교 동기들의 10년 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는 수학여행 일번지로 꼽히지만 즐기는 방식은 많이 바뀌었다. 까까머리 단발머리에 교복 입은 학생들의 빈자리를 연인과 가족 여행객이 채우고 있다. 그 중심에 달밤 아니어도 은은한 경주 야경이 있다.
경관 조명에 그윽하게 되살아난 신라의 신비
낮에 비교적 한산하던 ‘동궁과 월지’ 주차장은 해 질 무렵부터 붐비기 시작한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연인과 가족 여행객부터 관광버스로 온 단체 여행객까지 우르르 매표소로 몰려든다. 경내로 들어선 이들은 복원한 3개 궁궐 건물과 연못(월지) 둘레로 이어진 관람로를 따라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휴대폰을 꺼내 든다.
드디어 일몰 시간과 함께 경관 조명이 켜지면 여기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연못과 전통 건물에 투사된 조명은 야단스럽지 않고 은은하다. 그 옛날 횃불이나 촛불처럼 붉은 기운이 감도는 주황색 조명이 연못 석축과 붉은 건물 기둥에 그윽하게 스며든다. 잔잔한 수면에도 불기둥이 아른거려 관람객은 천년 전 신라의 시간으로 빠져든다.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시대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월지는 오랫동안 기러기와 오리가 헤엄치는 연못,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2011년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 월지가 조성되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후인 679년 동궁을 지었다고 한다.
동서 길이 200m, 남북 180m인 월지는 직선과 곡선이 교차하고 가운데에 작은 섬을 조성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 힘든 구조다. 연회 장소인 ‘임해전(臨海殿)’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바다를 상상하며 월지를 설계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동궁과 월지 입장 마감은 오후 9시 30분, 경관 조명은 10시까지 켜진다. 가장 큰 건물인 임해전 맞은편 연못가에서 보는 야경이 가장 아름답다.
달빛보다 빛나는 첨성대와 인증사진 명소 월정교
동궁과 월지에서 걸어서 약 1㎞ 거리에 신라 유적의 상징 첨성대가 있다. 신라의 천문학자들은 첨성대 중앙에 난 창문에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다. 태양과 달, 별의 움직임을 파악해 농사에 활용하고 나라의 길흉을 점쳤다. 첨성대를 구성하는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을, 꼭대기까지 30단의 석층은 한 달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아래 12단은 12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심오한 천문의 원리를 담은 건축물이다.
첨성대 주변은 사방이 평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하늘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듯한데, 지금은 오히려 밤마다 조명을 밝혀 일대에서 단연 눈길을 잡는다. 단단한 화강암은 아이러니하게도 빛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초록 파랑 분홍 주황 등 다양한 색상의 경관 조명이 번갈아 비치는데 원통형의 고고한 자태에 그대로 스며든다.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화강암의 질감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첨성대 일대는 별도 관람료 없이 언제나 개방돼 있다.
첨성대에서 다시 약 700m 떨어진 곳에 월정교가 있다. 경주 남천 위에 놓인 목조교량으로 왕궁인 월성과 서라벌 남쪽을 잇는 관문이었다.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2018년 교량과 문루를 복원했다. 다리 위에 올려진 2층의 멋들어진 누각이 하천 수면에 은은하게 비친 모습이 아름다워 단숨에 경주 야경과 인증사진 명소로 떠올랐다. 월정교 아래에 놓인 징검다리에서 보는 모습이 특히 매력적이다. 밤에는 징검다리 주변이 어둑어둑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대형 무덤 역시 여행객을 신라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첨성대 주변 고분과 대릉원에 경관 조명이 켜지면 크고 둥그런 곡선 윤곽이 한층 신비롭게 보인다. 신라 제13대 미추왕릉과 일대에서 가장 큰 쌍분 황남대총, 내부를 전시실로 만든 천마총 등이 몰려있는 대릉원은 경주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명소다. 대신 무덤 주변이 숲이라 봉분의 윤곽이 도드라지지는 않는 편이다.
인근 노동리·노서리고분군은 울타리가 없어 오히려 접근이 쉽다. 노동리고분군에는 ‘봉황대’라 불리는 거대한 무덤이 우뚝 솟아 있다. 둘레가 250m, 황남대총 다음으로 큰 고분으로 비탈면에 아름드리 팽나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일대에서 가장 높아 대(臺)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한편으로 자연스럽다. 밤 나들이 나온 주민과 여행객에게 야경 인생사진 명소다. 주변에 넓은 잔디 광장이 조성돼 있고, 매주 금요일 ‘봉황대뮤직스퀘어’ 상설 공연이 열린다. 고분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갖춰져 있다.
박·석·김 신라 왕조의 무덤과 숲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가 왕위를 교대로 계승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서 세 성씨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첨성대 인근 계림은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이다.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이었는데, 이 설화로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린다. 탈해왕 9년(65년), 조그마한 금빛 궤짝이 시림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궤짝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바로 김알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그는 왕위를 받지 않았고 그의 6대손에 와서 김씨가 처음으로 왕(13대 미추왕)이 된다. 계림 안에 있는 무덤은 17대 내물왕(356~402)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세습이 유지됐다.
계림은 숲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버드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활엽수가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흘러 한낮에도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일대가 모두 활엽수인데, 내물왕릉 주변만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계림으로 갈 때는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월성을 거쳐 가기를 권한다. 월성은 파사왕 22년(101)에 쌓은 이후 멸망할 때까지 신라의 궁성이었다.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은 곳으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곽 능선에 오르면 첨성대와 대릉원 일대, 경주 구도심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그 옛날 임금이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법한 넉넉한 풍경이다. 탐방로 초입에 얼음을 저장했던 석빙고가 있고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월성에서 약 3㎞ 떨어진 오릉은 박씨 왕조와 관련된 무덤군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기록돼 있다. 오릉 역시 계림과 마찬가지로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이다. 연못까지 깔끔하게 정비해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은 오릉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동궁과 월지에서 약 4㎞ 떨어진 금학산 기슭에 탈해왕릉이 있다. 경주 시내에 있는 유일한 석씨 왕릉이다. 탈해왕은 바닷물에 떠밀려 온 궤짝의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동해안에 살던 탈해가 기지를 발휘해 반월성 집터를 차지하며 신라의 지배계급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그린 일화도 전해진다. 그 일로 남해왕으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석탈해는 그의 사위가 되고 신라 제4대 왕에 올랐다. 탈해왕릉은 다른 고분에 비하면 크기나 주변 환경이 소박한 편이다. 단아한 무덤 앞에 아담한 솔숲이 조성돼 있다.
왕릉 바로 옆에는 신라 건국의 기원이 된 표암(瓢巖)이 있다. 신라 6촌 가운데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내려와 세상을 밝게 했다는 바위다. ‘박바위’ ‘밝은바위’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69년 여섯 촌장이 이곳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건국을 의결하고 12년 후 신라가 세워졌다. 경주 이씨의 뿌리인 동시에 신라 건국의 산실이자 민주 정치제도의 발상지인 셈이다. 조선 순조 때 이러한 뜻을 새겨 표암 위에 유허비를 세워 놓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