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의 [다시 본다, 고전2]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석회공장'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베른하르트의 책만 읽고 있었다. 마침내 보다 못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당장 베른하르트 읽기를 중단하고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베른하르트에 심취해본 독자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북독일의 기후 아래서, 그것도 침울하고 어두운 기나긴 겨울 내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시골 마을의 오두막에서 베른하르트만 읽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들기 쉽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무인도서 홀로 산다면, 베른하르트
책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음산한 저주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조로 과장되었다. 절반쯤 광증을 가진 자의 기나긴 독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목한계선 위의 황폐한 고원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사방으로 펼쳐진다. 자연은 자연으로서 독이고, 도시는 도시로서 독이다. 인간은 미쳤고, 갈 곳이 없다. 모두가 혼자이며 모두가 병들었다.
나는 베른하르트의 '서리'(Frost)와 '혼란'( Verstörung), 그의 자전적 소설들, 그리고 '그래요'(Ja), '암라스'(Amras) 등 중단편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다음으로 이어서 '석회공장'(das Kalkwerk)을 읽으려 한다고 말하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정말로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그 상황은 몹시 아이러니했는데, 원래 내가 베른하르트 읽기에 돌입하기 전에는 기회만 있으면 베른하르트를 칭송하던 장본인이 바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A작가를 읽고 있으면 “그는 베른하르트의 소프트한 버전이야”라고 하거나, B작가의 책이 좋다고 하면 “그의 언어는 상당 부분 베른하르트로부터 왔지”라고 평하는 식이었다. 내게 그것은 곧 “베른하르트는 언어야”하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베른하르트의 언어는 나를 병들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완전히 반대의 마음을 느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직 읽거나 쓰면서 보내지만 간혹 몇몇 친구들을 만날 때면 즐겨 나누는 화제가 있다. 만약 사람 하나 없는 무인도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홀로 지내야 하거나 혹은 종신형을 받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럴 때 단 한 권의 책만 허용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주로 루터 성서, 횔덜린, 프루스트, 무질, 조이스, 셰익스피어 등이 대답으로 나온다. 나는 거기에 베른하르트의 이름을 더한다.
살인사건을 보지 않은 자의 기나긴 증언
1970년 발표된 '석회공장'은 한 살인사건에 대한 제3자의 기나긴 증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저널리즘 소설, 법정 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증언을 하는 자는 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익명으로, 일종의 간접 증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보고 듣거나 경험하지 않았다. 단지 사건 당사자 주변 인물들로부터 들은 관련 내용을 재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책 전체는 영원히 이어지는 간접화법 진술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문단이다. “.... 라고 콘라드가 그렇게 프로에게 말했다고 한다”는 식으로 계속 반복된다.
콘라드는 수십 년간 청각에 대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연구는 이미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적어도 그의 주장대로라면- 종이에 기록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것을 기록할 만한 최적의 순간, 최적의 상황을 찾지 못했다. 그가 5년 반 전에 폐쇄된 석회공장을 사들여 이사를 온 것도 오직 연구를 위해서였다. 세상과 동떨어진 석회공장이야말로 그의 연구와 집필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보였기 때문이다. 콘라드의 아내는 수십 년째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녀의 생존은 전적으로 콘라드의 도움에 달려있다. 콘라드는 이런 그녀를 자신의 연구를 위한 실험대상으로 삼아 학대에 가까운 이용을 한다.
그들 부부 사이의 긴장은 책의 뒤편으로 갈수록 더욱 고조된다. 사실 콘라드는 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처지이다. 가진 돈은 모두 떨어졌고 석회공장을 담보로 받은 은행의 대출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 스스로 예감하듯이, 일생의 연구는 영원히 집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콘라드는 꿈속에서 마침내 연구 결과를 기록하는 데 성공한다. 그때 온몸이 마비되어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아내가 위층의 자기 방에서 스스로 콘라드의 방까지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콘라드가 자신 몰래 원고를 집필한 것을 무섭게 비난하면서 원고 뭉치를 난로 속으로 집어던져 버린다. 그리고 일 년 뒤 콘라드는 갖고 있던 총으로 아내를 쏘아 살해한다.
칭송받았으나 '애국자'는 증오한 작가
1931년 네덜란드 하렌의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난 베른하르트의 어린 시절은 그 세대에게 공통된 전쟁과 전후의 가난을 감안하더라도 유난히 혹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어머니 헤르타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의 가정부였으나 미혼으로 임신한 사실이 두려워 네덜란드로 왔고 그곳에서 낙태를 희망했으나 금지법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알려진다. 생부는 독일인 목수였으나 아들의 출생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생 동안 베른하르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외조부 요한네스 프로임비흘러에게서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프로임비흘러는 무명의 작가였는데 극도로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이외의 그 어떤 직업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딸이 가정부나 보모 일을 해서 가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 작가의 이름 베른하르트는 특이하게도 외조모의 전남편으로부터 왔다. 외조모인 안나는 재단사인 카를 베른하르트와 결혼한 상태에서 프로임비흘러를 알게 되어 남편과 가정을 떠났다. 이혼이 성립하기 전에 태어난 그들의 딸 헤르타는 어머니의 전남편 성을 따르게 되었고 헤르타의 사생아인 토마스 베른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르타는 이후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얻는다. 새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긴 했으나 베른하르트를 친자식처럼 대하지는 못했고 둘 사이는 마지막까지 어려운 관계로 남았다. 전후 오스트리아의 삶은 힘들고 궁핍했으며 베른하르트는 가족과 외조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나지움을 자퇴하고는 빈민가의 식료품점 점원으로 일했다.
1950년대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시와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1963년 첫 소설 '서리'를 발표했다. '서리'는 20세기 초 독일어권 문학에서 유행하던 '향토소설'(Heimatroman)에 반하는 '반향토소설'(Antiheimatroman) 장르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고요한 전후 오스트리아 문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영원한 논란의 작가, 많은 독자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동시에 애국자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만든 베른하르트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베른하르트의 글에는 치명적인 질병이 자주 등장하여 주인공의 정신세계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전쟁을 목격했고 결핵과 늑막염을 앓으며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 이외에도 죽음의 공포와 환각, 그에 따른 부정적이고 암울한 세계관, 세계 자체에 대한 극단적 비난과 단죄, 특히 고국 오스트리아를 향한 날카로운 독설은 베른하르트 문학의 특징이다. 그러나 또한 비관적인 과장 속에는 유머가 숨겨져 있으며 변주와 반복을 거듭하는 문장은 베른하르트 언어만의 음악성을 느끼게 해 주는데, 이 점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그의 독자가 되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고 나는 고백한다.
에피소드. '석회공장'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는 나에게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당연히 살인자는 책의 첫 부분에서 밝혀진 대로 콘라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책은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을 숨겨둔 것일까? 하지만 곧, 만약 그렇다면 그건 결단코 베른하르트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내 생각이 맞았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반-베른하르트적인 농담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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