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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약속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 된 것 같아 짜증이 나요"

입력
2024.06.17 07: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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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저는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청년입니다. 평소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사소한 뉘앙스를 크게 받아들이고 실망하거나 화를 자주 내는 편입니다. 사회적 인간관계도 두렵습니다. 22세 때 경계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고, 5개월 전부터는 정신 분석 상담도 받고 있습니다. 상담을 받으면서 저에게 집중하면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늘 공허함이 저를 지배합니다. 평일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나 주말에 일정 없이 보내는 오후 시간이 너무 불쾌하게 느껴져요. 그저 마음 편하게 유튜브를 보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쉬면 그만인데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뜰 때마다 약속이나 친구도 없어 집에만 있는 처지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아파지고 짜증이 납니다. 남들보다 뒤처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운동 등 생산적이고 스펙이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듭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만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 때에는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 누가 나오나 살피다 친구들이 있으면 따라 나가곤 했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나를 빼고 친구들이 얼마나 재밌게 놀았을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어요.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혼자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불안함에 시달렸습니다. 방학이면 친구들과 억지로 연락을 해서 만나러 나가곤 했습니다.

정말 친하고 끈끈하고 엄마 같은 여자 친구를 만나 편안해지기를 바랐지만, 여자 친구를 오래 만났는데도 공허함은 여전합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제 감정을 기록하는 '감정 일기'도 쓰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걸 써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겁이 많아 어머니 없이는 못 사는 아이였습니다. 일곱 살 무렵에도 대낮에 계단을 올라가는 일조차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무서웠어요. 아버지는 이런 저를 늘 비난하고 잔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보니 아버지가 너무 심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도 "어른이고 부모이자 고생하면서 돈을 버는 아버지 말이 다 맞다"고 말하곤 하셨죠. 또 계속되는 부모님의 다툼도 무섭고 두려웠어요. 경계성 성격장애를 진단받기 전까진 부모님이 준 상처와 불안정함 때문에 힘든 거란 걸 전혀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세상은 원래 이렇고 공허하고 외로운가 보다, 여기며 저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상담도 받고 있고, 진로를 위한 자격증도 땄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자꾸만 찾아오는 이런 공허함을 이겨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도 근본적인 회복보다는 공허함을 덮으려는 방어기제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상담과 여자 친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특히 여자 친구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과 버려졌다는 쓸쓸함, 혼자이고 이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많이 고통스럽습니다.

최근에 놀이공원에 갔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누구도 나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지적하지 않는 축제 같은 공간에서 함께한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았던 동심과 설렘도 느꼈습니다. 이런 결핍이 저를 괴롭게 하는 근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용민(가명·26·회사원)

용민씨가 만성적인 공허함으로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특히 다른 시간보다 휴일에 불쾌한 공허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아상이 불안정하고 감정 기복이 커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왜 하필 휴일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이해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평일에는 일이나 사회적 대인 관계 등 딱딱 짜인 구조가 있어 일관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은 휴일에는 불안이나 공허함이 커집니다. 상담가나 여자 친구의 상대적 부재 느낌도 평일보다는 휴일에 생겨날 가능성이 큽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분들은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렵고 불안하게 느끼게 됩니다.

평일에는 직업과 일을 통해 자신의 역할이 어느 정도 규정되지만, 휴일은 직업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시간인 만큼 자기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또 휴일은 가족들이 함께 놀러 다니는 만큼 거리에서 이들을 마주치기도 쉽습니다. 이에 따라 성장 과정이나 가족 간 갈등이 떠오르면서 공허함이나 우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휴일이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공허함이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성적인 공허함의 근본적 원인은 불안정한 자아상이고, 그 상태에서 인간관계를 맺다 보니 집착하면서 의존하게 되거나 반대로 아예 등을 돌리고 비난하는 식으로 불안정하게 이어 나가곤 합니다.

용민씨도 사소한 뉘앙스에 크게 실망하고 화를 낸다고 설명하셨듯이 경계성 성격장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면서도 그러다 실망하게 되면 분노를 크게 터트리고 또 수치심에 괴로워지곤 합니다. 자아상이 불안정하고 자기와 타인의 심리적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반응에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는 것이죠.

'경계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자아의 경계에 대한 감각의 발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나와 타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남들 반응에 좌지우지되고 민감해지다 보니 지속적 안정을 줄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용민씨에게는 여자 친구가 그렇듯 버림받을 염려 없는 확실한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집착하면 결국 문제가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유년기에 부모에게 보호받고 지지받으며 애착 대상에게 기본적인 신뢰감을 가져야 정체성이 확고하게 발달합니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그러지 못한 성장 과정으로 자아상이 불안정해져 끊임없이 애착을 추구하게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용민씨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에게 이를 갈구하며 해결했으나, 성인이 되면 여러 이유로 수월하지 않죠.

안타깝게도 당신은 잔소리하고 비난하는 아버지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머니로부터 충분히 지지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두려움도 느꼈고요. 평소 자기 역할을 하면서 일상을 보낼 때는 이런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을 묻어 둘 수 있지만, 휴일이나 혼자가 되는 시간이면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 괴롭고 우울하고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하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고 이 시간에 본인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스스로가 이렇다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놀이공원에서 어린 시절의 동심을 충족하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했지만, 사회는 그렇게 즐겁고 따뜻한 사람들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용민씨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경계를 명확히 세우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무엇보다 용민씨에게 휴일이 괴로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간이 진정한 본인의 내면을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감정 일기를 쓰고 계속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휴일에도 일정한 일과를 만들어 유지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휴일이라도 평일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밥 먹는 시간도 평일과 비슷하게 드시는 식으로 일종의 루틴을 가져가는 겁니다. 그렇게 체계를 잡는 일 자체가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이를 해 나가면서 자기 마음을 헤아린다면 조금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경계성 성격장애 치료에서 매우 중요한 정신분석 상담을 받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시는 용민씨를 격려해 드리고 꾸준히 하시도록 응원하고 싶습니다. 보내주신 사연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제대로 표현하는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자기 마음을 인식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일관된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점차 공허감과 불안정감 대신 충만감과 안정감을 경험하고 용민씨가 원하는 삶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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