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노인 일·주거 함께하는 공동체 만족
"용돈도 벌고 친구도 있으니 외롭지 않아"
65세 넘어도 적성 감안 구직 시스템 필요
세대 혼합·안전 강화 노인 친화 주택 늘려야
"주치의·방문 진료 등 맞춤형 의료도 강화를"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하루 종일 방 안에 덩그러니 있으면 엄청 외롭지. 끼니 챙겨 먹는 것도 일이야. 여긴 친구도 있고 소일거리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은퇴농장사람들' 입주민 김모(87)씨
야트막한 언덕과 뒷동산이 한눈에 보이는 충남 홍성군의 한 시골마을. 이곳엔 은퇴 후 농부가 된 7명의 노인들이 있다. 94세 최고참부터 73세 막둥이까지 함께 먹고 일하며 수다를 떤다. 사업가와 자영업자, 월급쟁이로 평생을 치열하게 일했던 이들은 은퇴 후 마주한 경제적 어려움과 지독한 외로움을 피해 제발로 이곳을 찾았다.
"외롭지 않고, 용돈도 벌고 1석 2조"
마을 이름은 '은퇴농장사람들'. 은퇴한 노인들이 함께 살며 농사를 짓고 수익을 나눠 갖는 농장이다. 입주민은 매달 105만 원을 내면 화장실과 침대가 딸린 원룸을 배정받고 하루 세 끼 식사도 해결할 수 있다. 몸이 아프면 농장 주인 김영철 대표가 병원까지 데리고 간다. 김 대표와 일꾼들이 1만6,529㎡(약 5,000평) 노지 및 시설하우스에서 고추, 대파, 쪽파, 양배추 등을 재배하면 어르신들은 판매용 포장봉투에 수확한 농작물을 담아 1개당 250원을 받는다.
이달 7일 마을을 찾았을 땐 한 살 차이 단짝 백모(86)씨와 김모(87)씨가 미나리를 포장하고 있었다. 백씨는 이곳에서 7년째 거주 중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 인천, 대전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사업도 하고 장사도 했다. 아파트 경비일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백씨를 써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게 됐다. 혼자 살 땐 할 일이 없어 하루가 너무 길었다. 식사도 자주 걸렀고 몸이 아플 땐 돈 걱정에 병원을 찾기도 어려웠다. 백씨는 "이곳에선 친구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용돈벌이도 있어 너무 좋다"며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걱정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입주한 지 6개월 된 김씨는 지난달 농작물 포장일로 100만 원을 넘게 벌었다. 그는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에게 신세도 갚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싶다"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김씨와 백씨처럼 외롭지 않고 일거리도 있는 노인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노인이 행복한 세상'은 먼 나라 이야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눈에 보는 연금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7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52%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미래를 내다보며 ①일자리 ②주거 불안 ③의료 소외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①일자리 "65세 정년 연장 논의해야"
노인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자리 창출과 정년 연장이다. 현재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한국에선 평균 45세를 전후로 핵심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충분한 자산을 모으지 못한 채 20~30년 동안 허드렛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내년부터 초고령사회(노인 비율 20% 이상) 진입을 앞두고 있는 만큼, 최소 65세까지 정년을 늘리는 방안을 당장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프랑스는 62세, 독일과 스페인은 65세가 정년이다.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신체 능력과 적성을 감안해 구직 노인과 일자리를 연결해 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식품기업인 풀무원의 김치박물관 '뮤지엄김치간'에서 일하는 '시니어도슨트' 권성경(60)씨는 은퇴 후 적성에 맞는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권씨는 10년간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직했다. 은퇴는 했지만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권씨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청소와 식당일 등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대부분이었다.
권씨는 한 달 동안 속앓이를 하다가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를 통해 시니어도슨트 채용 공고를 접하게 됐다. 어린이집 교사를 할 정도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좋아했던 권씨에게 맞는 일이었다. 시니어도슨트가 된 권씨는 현재 외국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김치의 역사와 문화,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권씨는 "주변 친구들도 은퇴 후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면서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많아지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②주거 "노인주택 늘리고 소통공간 넓혀야"
노인 주택 보급도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확대돼야 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같은 공공기관에선 저소득 노인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공급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문턱을 낮추거나 안전 바를 설치하는 등 노인 친화적인 게 특징이다. 노인 주택은 현재 3만 가구 수준으로 전체 500만 고령 가구의 1%도 되지 않는다.
유선종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 힘만으로는 노인 주택을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민간기업도 공급에 뛰어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건설사들이 노인 주택 공급을 늘리면 각종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실질적 대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노인들이 집에 갇혀 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도 사회적 고립을 피할 수 없다. 홍성의 은퇴농장사람들도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노인들이 경제활동과 여가활동을 함께 하며 소통하는 공간이다. 노인들의 고립을 막기 위해선 '세대 혼합형' 거주지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파트를 새로 지을 때 노인 주택을 별도 단지로 분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노인과 신혼부부, 청년이 한 공간에서 어울릴 수 있도록 주택 관련법을 정비해야 한다"며 "노인들이 주거지에서 어린이들의 안전을 돌봐주는 등 나름의 역할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③의료 "노인질병센터 늘리고 방문 진료 필요"
의료 시스템도 노인 맞춤형으로 확 바꿔야 한다. 노인들은 대부분 5, 6개의 질병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저소득층 노인들은 경제적 부담과 신체적 기능 저하로 제대로 병원을 이용하기 어렵다. 서울 중계동에서 만난 기초생활수급자 이영만(78)씨는 "치아도 많이 아프고 소화기능도 안 좋은데 몸이 불편해 병원을 오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며 "특히 임플란트 4개를 심어야 하는데 정부에선 2개까지만 지원해, 나머지 비용 200만원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①노인 맞춤형 건강검진 도입 ②방문진료 확대 ③대형병원 노인질병센터 설치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인 맞춤형 건강검진은 노인 질환을 사전에 예방해 의료비 지출을 낮추는 게 목적이다. 65세 이상 노인이 받는 국가건강검진 항목에 기억력 감퇴, 인지능력 상실, 관절기능 퇴행 등 노인성 질환 항목을 추가하는 게 골자다.
방문진료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집을 의사가 직접 찾아가 진료하는 방식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재택진료가 활성화된 일본에선 의사가 월 2회 정도 방문해 검진을 해준다.
노인질병센터는 고위험 산모를 집중 관리하는 고위험 산모 신생아통합센터처럼 노인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특화된 의료기관이다. 노인이 센터에 입원하면 외과, 내과, 흉부외과 등 분야별 전문 의료진들이 센터로 찾아와 검사하고 진단한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원스톱 검사를 받을 수 있고, 의료진은 환자 상태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관리가 편하다.
하지만 서울의 '빅5' 대형 병원(서울대병원·신촌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에도 노인 환자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전문센터는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노인의학 전문가인 윤종률 한림대 교수는 "노인들은 여러 질병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어 제때 치료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의료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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