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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나빠요" 여전한데... 외국인 노동자 기댈 곳, 국가가 돈 끊었다

입력
2024.06.27 04:30
수정
2024.06.27 09:53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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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이민정책-①사회구조 전략으로]
외국인 거점 노릇하던 이주노동자센터
올해 정부예산 전액 삭감으로 문 닫아
의지할 곳 사라지고 오랜 노하우 유실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스리랑카 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노무사와 함께 임금 체불에 관한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스리랑카 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노무사와 함께 임금 체불에 관한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사장한테) 언제 두들겨 맞았어요?"
"(밀린 월급) 얼마나 못 받았어요?"

지난달 26일. 일요일인 이날 경기 의정부시 이주노동행정사 사무소엔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원래 이곳은 비자신청을 돕고 출입국 업무를 대행하는 행정사 사무소다. 그런데 이날 류지호(49) 대표(행정사) 입에서 비자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장에서 있었던 폭행이나 가혹행위, 임금체불 등 법적 이슈가 대부분이었다.

행정사 사무소는 오전 10시부터 쉴 틈이 없었다. 대기석까지 꽉 차 사무실 밖 계단에 걸터앉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무소의 이날 수익은 사실상 0원. 류 대표가 돈을 받지 않고 해주는 상담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은 왜 이렇게 돈도 안 되는 힘든 일을 떠맡고 있을까. 지난해까지 운영됐던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시절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정부가 올해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부터 센터 운영은 불가능해졌다.

제도권 밖 밀려나고 3달, 절박한 발걸음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 의정부이주노동자센터에서 류지호 대표가 센터를 찾은 이주노동자들과 상담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 의정부이주노동자센터에서 류지호 대표가 센터를 찾은 이주노동자들과 상담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예산 끊어져 문 닫던 날 막막했죠, 이 사람들 다 어떡하라고."

상담팀장으로 20년간 의정부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를 이끌었던 류 대표는 올해 1월 센터 문을 닫던 날을 떠올리면 아직 가슴이 아리다. 그간 센터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체불이나 사업장 변경 같은 노무 상담은 물론이고, 병원 업무나 범죄피해 등 실생활 고충 상담을 담당했다. 한국어 교육까지 맡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지역 거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4년부터 전국 9개 주요 센터와 35개 소지역센터가 운영됐는데, 의정부 센터는 그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커서 15개 언어로 상담이 가능한 종합센터였다.

그러나 올해 전체 예산(전국 약 70억 원)이 다 삭감되어, 이 센터들은 다 문을 닫아야 했다. 의정부 센터도 1월 업무를 끝냈는데, 그러고서도 직원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메신저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구조 요청'이 쏟아졌다.

이대로 그만둬야 하나, 류 대표는 고심했다. 그래도 10년 넘게 쌓아온 전문 지식과 전문인력을 포기할 수 없었던 류 대표는, 정부 지원 없이 이주민 노동자들을 껴안기로 했다. 행정사 자격증이 있었던 그는 고민 끝에 올해 3월 사무소 창업을 결정했다. 행정사 일을 하며 외국인노동자센터 운영 예산을 벌어, 노동자 지원 업무를 계속해 보고자 했던 것. "외국인 노동자가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거점을 일단 부활시키자, 그게 목표였어요." 그래서 센터 직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임금을 넉넉히, 안정적으로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고맙게도 직원들은 흔쾌히 모였다.

네팔인 상담사 유동준(네팔명 세르빠 락빠·40)씨는 "센터가 문 닫은 두 달 간 네팔인 노동자들에게 하루 수십 개씩 메시지가 왔고, 예전처럼 하루에 몇 시간씩 답장을 했다"며 "막막한 상황인 걸 아는데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인도네시아인 상담사 시타이니(54)도 주로 비전문취업(E-9) 비자로 들어오는 청년들을 위한 권리 구제 정보를 제공하는 틱톡 채널을 팠다고 했다. 그렇게 류 대표와 직원들이 사비를 털어 문을 연 게 지금의 사무소다. 행정사 사무소가 외국인노동자센터 역할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네팔인 통역사 유동준(왼쪽) 상담팀장과 미얀마인 통역사 수인띤택 상담팀장이 전화 응대를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네팔인 통역사 유동준(왼쪽) 상담팀장과 미얀마인 통역사 수인띤택 상담팀장이 전화 응대를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올해 3월 기존 건물 건너편에 센터가 다시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날도 약 80명이 찾아왔다. 국적은 미얀마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까지 다양했다.

가장 많이 접수된 상담은 역시 임금체불. 개업 두 달 간 센터가 불량 사업주로부터 받아낸 체불액만 9,000만 원에 달한다. 미얀마에서 온 피에툰저(25)는 툭하면 노동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업주에게 말대꾸를 했더니 일이 끊기고, 폭행까지 당했다. 한국 개그맨이 스리랑카 노동자로 분장해 "사장님 나빠요"라며 외국인 노동자 홀대를 알리던 때가 2004년(KBS '폭소클럽')인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폭행과 월급 떼먹기 관행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행정사사무소는 그와 함께 고용부와 경찰서에 민원 접수를 도왔다. 피에툰저는 "모국어로 내가 처한 상황을 왜곡 없이 설명할 수 있어 무사히 합의까지 갔다"며 "든든하고 보호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한국어 교육도 한창이었다. 과거 센터에서 무료로 진행되던 강의를 부활시켰다. 가격은 무료로 할 순 없어 한 달에 4만 원을 받는다. 동티모르에서 온 메타(29)씨는 "회사의 한국인들과 편히 얘기하고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의정부 센터가 갑자기 사라져 한국어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곳이 마땅히 없더라"며 웃었다.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를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 능력시험 강의를 듣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를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 능력시험 강의를 듣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그러나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이상, 운영은 여전히 어렵다. "예전엔 온전히 구제 업무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이젠 월세 120만 원과 직원들 월급 걱정도 해야 하니까요." 류 대표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후원 받거나, 가게에 건강식품을 비치하고 받는 '홍보비'로 버티고 있다고 한다. 센터에서 10년 이상을 일했던 통역사 8명 중 단 2명만 고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24시간이 모자라" 슈퍼맨 수녀님

수도권 밖 상황은 더 심각하다. 김 마리 율리에따 수녀는 예산 삭감으로 상담 직원들이 전부 떠난 뒤부터, 전남 순천·여수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주민 관련 민원을 사실상 혼자 맡는다. 수녀가 해야할 일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떼인 돈 받기, 출산 지원, 업주 상담까지 다양하다.

한국일보와 만난 지난달 22일도 김 수녀의 하루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오전엔 병원에서 수술 예정인 이주민의 경과를 전해 들었고, 오후엔 단속 후 구금돼 출국을 앞둔 미등록 이주민을 면회하러 간다. 다음은 범죄 피해를 입은 이주민을 도우러 경찰서에 가고, 한국말을 못하는 베트남인 부부 대신 자녀의 대학 진학 상담을 받으러 학교도 방문해야 한다. "이주민 관련이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센터가 긴급 출동하는 구조"라고 그는 설명했다.

김 수녀는 현행 이주민 정책은 '두 얼굴'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값싼 노동력을 쓰고는 싶으면서도, 정작 이주민 노동자들의 현실에는 무관심한 그 이중성 말이다. "해외로부터 노동 수입을 늘리고 다문화를 말하면 뭐해요? 외국인이 겪는 생활 속 문제에는 무심하면서."

국가도 지역센터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2023년 국고보조사업 연장평가 보고서’에서 지역 이주민센터 지원 사업에 대해 "향후 이민자와 이주 근로자 증가가 예상돼 정책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짚으며 "성과지표도 우수"하다고 판단했다. 관련 예산에 대해서도 "실질적 운영에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적정 규모라고 봤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는 폐쇄를 통보했다.

올해 고용부는 지방자치단체 공모를 받아 전국 9개소에 센터를 4월 다시 세웠다. "국가의 관리 하에 둬 권리 구제 시 기관별 연계 작업을 쉽게 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충분한 대안이 될 지엔 회의적 시선이 따른다. 새 센터 한 곳당 배정된 예산은 예년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어든 4억 원. 이마저도 그중 절반은 지자체가 부담하고 있다. 심지어 의정부 등 일부 주요 센터가 맡던 곳들은 새 거점에 포함되지 않았다.

업무 정밀도도 기존보다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로 개소한 지역 센터를 이용한 한 외국인 노동자는 "받아야 했던 임금, 퇴직금 계산은 커녕 '(고용부) 근로감독과로 가라'는 안내가 전부였다"며 "(예전 센터는) 진정 접수부터 떼인 돈을 받기까지 도와줬는데, 막막해졌다"고 털어놨다.

그들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도네시아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노무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지난달 26일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이주노동행정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도네시아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노무사와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박시몬 기자

이주노동자센터가 사라지면서, 힘튼 타향살이를 하는 이주민들이 심적으로 기댈 기반이 사라졌다. 태국어와 라오스어 통역사로 일한 솜쏭(34)은 "결국 상담도 사람들 간의 대화이기 때문에 상담사와 노동자의 신뢰와 유대감이 가장 중요하다"며 "지역을 옮겨도 '선생님이랑 얘기 하고 싶다'며 먼 데서도 찾아오던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센터의 폐쇄는 '거점'의 상실을 넘어 '인적 자산'으로 손실로도 이러진다. 귀화 베트남인 통역사 이홍옥(51)씨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고용허가제에 대해 강의를 맡을 정도로 전문적 지식을 갖췄다. '왜 관영 센터에서 일하지 않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공무원이라 겸직은 안되는데, 최저임금만 주거든요." 그렇게 17년간 일한 베테랑의 노하우는 그대로 공중분해될 위기에 몰렸다. 실직한 솜쏭과 이홍옥 두 사람은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 현장 방문 상담을 하고 있다.

의정부 행정사에서 노무 조언을 맡은 김광일 노무사는 '연대의 거점'으로 자리 잡은 센터를 정부가 굳이 없앨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그는 "센터 폐쇄는 시대 역행적 결정"이라며 "이젠 민원이 '처리'되는 걸 넘어 반복적인 고충을 낳는 이민 제도를 들여다볼 때"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돈을 끊었지만, 현장을 지키는 전문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쌓은 소중한 인연을 끊지 않았다. 이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언어·비자의 장벽에 가로막혀 '사람다운 삶'을 단념하는 이주민을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다"고 외치는 중이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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