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적자 메우려 증세 추진… 젊은 층 반발
시위대 의회 난입에 경찰, 실탄·최루탄 쏴
중·러 견제 위해 케냐 공들이던 미국 '난처'
아프리카 동부 케냐에서 25일(현지 시간) 격렬한 '증세 반대' 시위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법안의 의회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해 불을 질렀고,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최소 20명 안팎의 사망자와 100여 명의 부상자가 나온 것이다. 혼란이 거세지자 윌리엄 루토 대통령은 결국 법안을 철회하겠다고 물러섰다.
생필품 등 전방위 증세안… 분노한 시위대, 의사당 난입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케냐 의회는 이날 재정 법안 3차 독회를 마친 뒤 이를 찬성 195표, 반대 106표로 가결했다. 계란 등 생필품은 물론, 각종 수입품에 대한 세율 인상 등 전방위적인 증세 방안을 담은 법안이다.
케나 전역은 분노로 들끓었다. '루토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시위대는 수도 나이로비에 있는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며 입구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시위대를 몰아내기 위해 실탄과 최루탄을 발사했고, 이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했다. 케냐인권위원회는 22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했고, 케냐의사협회는 최소 2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미 CNN방송은 "최루탄 가스에 휩싸인 이들 중에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이복 누나인 아우마 오바마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의회를 점령하라'라는 이름이 붙은 이번 증세 반대 시위는 지난 18일 수백 명 규모로 시작됐다. 정부가 빵 부가가치세, 자동차세 등에 대한 일부 증세를 철회했지만, 시위대는 법안 자체를 아예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20일 경찰의 최루탄 및 실탄 발포에 한 20대 청년이 사망하자 시위는 더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됐다.
정부 수입 37%가 부채 이자로… 증세 밀어붙이는 케냐
케냐 정부가 증세를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심각한 재정적자가 있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케냐는 부채 이자 지급에만 연간 정부 수입의 37%를 쓴다. '부채 기반' 경제 구조인 셈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7억 달러(약 3조7,500억 원)의 세금을 추가 징수하겠다는 게 문제의 법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케냐 정부에 요구한 사안이기도 하다.
케냐 경제는 최근 코로나19, 무역 위축, 가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다 지난해부터 보조금 철폐, 건강보험료·전기요금 인상 등이 잇따르자 불만이 고조됐다. 시위대는 "루토 대통령이 케냐를 괴롭혀 온 고위층 부패에는 눈감고 서민 증세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이번 시위는 이른바 Z세대(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 출생)로 불리는 젊은 층이 전면에 나서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현장 영상과 사진을 공유하며 서로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시위 동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러 견제 위해 루토 정권 품으려던 미국도 '골치'
파장은 해외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미국도 골머리를 썩게 됐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서방 성향 루토 정권에 공을 들여 왔다. 전날 바이든 대통령이 케냐를 '비(非)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주요 동맹(MNNA)'으로 지정한 게 대표적이다.
이날은 루토 대통령이 미국 등의 요청을 수용, 갱단 난립으로 혼돈에 빠진 아이티에 경찰관 400여 명을 파견한 날이기도 하다. NYT는 "미국의 영향력이 아프리카에서 급감하는 가운데, 케냐를 휩쓴 혼란이 루토 대통령을 단단히 끌어안으려는 바이든 행정부에 타격을 줬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루토 대통령은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정 법안에 서명하지 않겠다"며 결국 증세 철회 방침을 밝혔다. 그는 "법안 통과 이후 국가는 광범위한 항의를 경험했으며 유감스럽게도 인명 손실, 재산 파괴, 헌법 기관 모독을 초래했다"며 "불행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향후 청년층과 대화를 시작할 것이며, 대통령실 예산 삭감을 포함한 긴축 조치에 착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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