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이민정책-②문화적 차이 넘으려면]
"그냥 가시라" "내 마음이다"... 드높은 콧대
도움은 못 받고 상처만 받고 돌아서길 반복
개별 직원 재량권 지나쳐 눈치 보기가 일상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선생님, 왜? 가라니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지난달 22일 서울 양천구 오목교역 인근 서울출입국외국인청 민원실에 반말 조 고성이 울렸다. 창구 너머에서 날아온 호통을 듣던 아랍인 알만(가명·30)은 움찔하다가 말없이 이내 돌아섰다. 그는 계단에 우뚝 서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넘겨봤다. 그가 본보 기자에게 보여준 포스트잇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난민(신청자) 비자를 6개월 연장하고 싶어요.'
알만은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본 지인이 대신 적어준 이 메모 한 장을 믿고 이곳에 온 터였다. 난민 심사 결과를 기다리던 그는 외국인청에서 무엇을, 왜 해줄 수 없다는 것인지, 언제 다시 오면 되는지, 알고 싶었던 답을 전혀 듣지 못하고 일단 밀려났다. "Maybe not today, I come back tomorrow(일단 오늘은 안 된다는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와보려고요)." 서툰 영어로 답한 알만은 건물을 빠져나갔다.
같은 건물 정문 앞에서 가족에게 전화로 베트남어를 쏟아내던 유학생 안(가명)도 눈물을 보였다. "이달 말 비자가 만료돼 연장하려 왔는데, 그 전에 잠깐 본가에 다녀와야 되거든요. (직원이) 이 얘기를 듣더니 '심사에 지장이 갈 수 있다'며 가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말이 서툴어 자세히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닐까 통역 직원에 도움을 청해봐도 '일단 기다려'가 전부였다. 더 물어보려 했지만 언짢은 표정의 직원, 지친 표정으로 민원실 대기석을 채운 20여 명이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돌렸다고 했다. "제 비자 어떡해요, 저 계속 한국에 있을 수 있어요?"
간절한 이들이 찾은 외국인청(출입국 관리사무소)은 외국인의 비자(체류자격) 관리부터 불법체류자 단속, 난민, 다문화 정책까지 외국인과 관련된 일을 도맡는 법무부 산하 기관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마주하는 첫 국가기관이고 체류 중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해우소 같은 곳이지만, 본보가 이번 취재를 통해 만난 이주활동가들과 외국인들은 이곳에서 적절한 안내는커녕 냉대만 당했다고 털어놨다.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그 곳
이주민 지원 활동가들은 외국인 업무의 구체적 사항들이 외국인청 개별 직원의 행정 해석에 맡겨진 탓에, 많은 이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어떤 직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안내 받은 절차가 뒤집히기도 하고 앞선 절차가 물거품이 돼 몇 달을 다시 애 태워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자녀를 낳은 필리핀인 아야(가명·47)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행 제도 상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민 자녀는 출생등록을 할 수 없지만,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도 조건부 체류를 허용한다. 다만 불법 체류자(미등록 이주민)의 경우 이때 수백 만원 범칙금을 내야 한다. 임신 상태에서 비자가 만료돼 미등록 상태로 한국에서 출산하기로한 아야는 초등학생이 되는 아이만은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청소와 식당 일을 하며 범칙금 900만 원을 '미리' 모았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암 수술로 1,000만 원을 써야 했고, 회복을 위해 반년 간 일을 쉬다보니 수입도 끊겼다. 이제 남은 돈은 300만원 뿐이었다.
제도상 명확한 구제책이 있었으나, 외국인청의 상담 거부로 아야는 몇달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법무부는 납부가 어려울 경우 범칙금의 '적극' 감면이 가능하며, 이를 위한 상담이 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다. 아야 역시 이주민 단체의 도움을 받아 외국인청 조사관에게 의료비, 월 수입과 지출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했다. 곧이어 외국인청에서 범칙금 액수를 조정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으나, 외국인청 관계자는 '범칙금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상담을 거부했다. 동행한 한국인 활동가가 "절차대로 하시라"며 항의하자 "정해진 절차는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을 기다려온 상담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끝나 아야는 기약 없이 재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인도 버벅인다
이렇게 이민당국의 문턱과 콧대가 높아, 말이 서툰 이주민 혼자선 업무 처리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한국인이 없으면 쉬이 고립되고, 한 번 고립되면 미등록 이주민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방글라데시인 친구가 그런 일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미용사 김영미(55)씨는 '오픈런 마스터'가 됐다. 김씨는 미용실 직원 나디(가명·45)가 어느 날 비자 갱신을 위해 업장을 떠난 뒤 종일 소식이 없다가 성과 없이 되돌아온 날을 기억한다. "하루 종일 줄을 서서 겨우 순서가 됐는데, 몇 분만에 끝나버렸다는 거예요. 서류가 빠졌다고, 그냥 나중에 다시 오라고만 했대요." 그는 '까짓 것 내가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 붙였다.
한국인인 김씨에게도 외국인청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사전 방문 예약을 받긴 하지만, 최소 넉 달 전부터 마감되는 탓이다. 막연히 줄을 서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예약 없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대기석은 꽉 차있었다.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야 순서가 겨우 돌아왔지만, 이날에도 서류 한 장이 빠졌다는 이유로 반려돼 처음부터 다시 이 과정을 밟아야했다.
부처 간 소통이나 적절한 연계가 안 돼 헛고생을 한 적도 있다. 나디가 미용사 면허 시험에 합격한 날, 외국인청에서는 "비자 여건 상 안된다"며 돌려보냈다. 산업공단으로부터 '취업활동 허가만 받으면 된다'는 답을 받았다고 하자 직원은 "부처 소관이 달라 우리는 잘 모르겠다"며 손만 내저었다. 그렇게 타국에서 '70수' 만에 합격 신화를 쓴 나디씨는 면허증이 나오지 않아 가위를 잡지 못한다. 그간 쏟은 땀과 노력이 부처간 불통에 의해서 없던 일이 됐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듣지 못했다.
이제 김씨는 나디가 외국인청을 찾아야 되는 날이면 가게 문을 닫고 함께 간다. 문 열기 30분 전인 오전 8시 반이면 도착해 대기줄에 합류하고, 메모장도 상시 지참한다. "저도 그랬지만 한국인들은 여기 올 일이 없으니 이런 불편이 있는 줄 상상도 못해요. 나라가 나서서 인종차별 하는 것이죠. 같은 땅에서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이웃인데, 이게 말이 되나요?"
이주민들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은 외국인청 직원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과도한 '재량권'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주노조 소속의 정영섭 활동가는 "외국인청 직원 개개인이 이주민의 체류 자격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며 "범칙금 구제 대책에도 '필요 시 상담' 등 모호한 말로 명시해두는 등 공무원 한 명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액수를 감면해줄 수 있는 식"이라 설명했다.
"나라, 현장 유형 나눠 세부 매뉴얼 짜야"
서울 사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 리타(가명·31·가명)도 일관성 없는 행정 해석에 혼란을 겪었다. 서남아시아 출신의 그는 올해 1월 한국에서 홀로 딸을 낳았다. 어느 새벽 체온이 오른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급하게 응급실을 찾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리타는 처치비로 100만 원을 내야했다.
유학생 비자로 체류하며 건강보험료를 내던 리타는 아이 몫의 건강보험을 신청하기로 했고, 본국 대사관에 신분증 용도의 여권 발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여권 발급이 일 년 이상 걸리기로 악명 높았고, 심지어 "싱글맘인 당신은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발급 심사가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답도 받았다. 막막하던 차에 동앗줄을 발견했다. 부산 외국인청에서 인도, 캄보디아처럼 여권 발급이 늦는 국가들에 대해 '여권 신청 증명서'를 신분증으로 인정해줬다는 사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서울 외국인청 담당자는 구제 절차 안내도 없이 "여권 없으면 안된다"며 잘랐다. 리타는 "아이가 아플 때마다 지역을 (부산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된다"고 토로했다.
점점 더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이 들어오는 만큼, 이에 걸맞도록 이민당국의 대응 매뉴얼의 변화도 필요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특히 취합된 데이터에 따라 세부 원칙들을 짜야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송은정 이주민센터 친구 국장은 "각각의 문화권, 주거 형태나 상황이 다른데 한 명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창구에서 만난 한 명이 획일적인 기준으로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다양한 사례가 발생하는 현장의 유형을 나눠 세부 매뉴얼을 마련, 대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다양한 국적, 상황 속 외국인들과 직접 대면하는 출입국관리 공무원의 문화 이해도를 제고하기 위해 '세계 이민 동향' 등 법무부연수원 교육과정을 수강하도록 하고, 재한 외국인로부터 상호 문화에 대해 듣고 교류하는 온라인 과정도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먼저인 건 관공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의 해소다. 본보와 인터뷰한 한 싱글맘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제 출신 국가와 이름 모두 가려주세요." 혹시라도 외국인청 담당 직원이 기사를 읽고 심사에 불이익을 줄까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이 기사의 모든 외국인 취재원들도 같은 이유로 가명을 요구했다. 그들은 답답한 마음에 그간 겪은 불친절을 토로하면서도, 정작 각자의 담당 직원이 이 기사를 읽지 않길 소망했다. 민원인이 담당자의 '뒤끝'을 걱정하는 가위눌림의 공간, 한국인은 평생 갈 일도 없고 그 움추림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장소, 바로 오목교 역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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