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작가 산문집 ‘아무튼, 디지몬’
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언니, 만약 언니가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럼 갈 거야? 그러니까 엄마 아프기 전으로. 쓰러지는 걸 막을 수도 있어. 대신 지금은 전부 사라져.”
답이 정해진 질문 같은데도 언니의 고민은 길어진다. 물은 나도 고민이 길어진다.
한참 뒤, 언니가 입을 연다. “아니, 안 갈래.” “왜?” “10년 동안의 내 삶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한국 공상과학(SF) 장르를 대표하는 천선란 작가는 산문집 ‘아무튼, 디지몬’에서 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천 작가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져 치매 판정을 받습니다. 어린 시절 선택받은 아이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일본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를 보며 “내게도 디지몬이 나타나 주면 좋겠다”고 바랐던 그에게 어머니는 ‘나이 많고 어린 디지몬’ 같은 존재가 됩니다. “세상과 홀로 싸우다 모든 데이터를 소진해 유아기로 돌아간.”
중증 환자가 된 가족은 구성원 모두의 삶을 바꿉니다. 소설가를 꿈꾸던 천 작가는 글 대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고, 약학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언니도 취업을 택합니다. 해외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는 한국에서 출근길과 퇴근길,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어머니를 보러 갑니다.
자매의 대화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무심코 떠올린 “당연하지”라는 답변을 부끄럽게 합니다.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 가족의 10년이 괴롭고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직 고통으로만 가득 찬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자매의 아버지도 말합니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물론 엄마에게 더 좋았겠지만, 그게 정말 우리 삶의 최상이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모든 것을 잊고도 둘째 딸의 꿈이 ‘작가’였다는 사실만은 기억하는 어머니의 한마디로 천 작가가 결국 소설을 썼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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