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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열강이 베트남전쟁을 외면한 이유

입력
2024.07.1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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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베트남전의 이면- 2

1961년 6월 회담을 끝내고 엘리제궁을 나서는 존 F. 케네디(앞줄 오른쪽)와 드골 대통령. J.F. Kennedy Library

1961년 6월 회담을 끝내고 엘리제궁을 나서는 존 F. 케네디(앞줄 오른쪽)와 드골 대통령. J.F. Kennedy Library

(이어서)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호찌민 군대에 의해 쫓겨난 프랑스는 처음부터 베트남전쟁과 확실히 선을 그었다.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바닥을 알 수 없는 군사적 정치적 늪이 될 것”이라며 전쟁을 말렸고, 전쟁 초기부터 미국의 패배를 예견했다.
동독과 첨예하게 대치하며 미국과의 신뢰에 의존하던 서독은 당연히 미국을 편들었고 국민 여론 역시 70%가 베트남전쟁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와 달리 핵무기는커녕 파병할 군대조차 없었다. 서독은 내심 베트남전에 미군이 쏠려 자국을 방위할 미군이 감축될 것을 우려했다.
2차대전 이후 이어진 재정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영국은 당시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사태, 즉 영국 식민지였던 남로디지아의 민족주의 독립 봉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유럽 없이 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서방 측 사연과 달리 공산권 국가들은 호찌민의 사양 때문에 그 전쟁에 적극 개입하지 못했다. 호찌민은 자신들의 전쟁을 이념-체제 전쟁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외세 침략에 맞선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외국 군대가 개입하면 전쟁의 본질이 바뀔 뿐 아니라 또 다른 외세의 내정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원칙적으로 소련과 중국의 파병을 거부했다. 돈을 빌려 무기는 살 수 있지만, 피와 뼈를 빚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무 대가 없이 돕겠다는 쿠바의 제안도 거절했고 북한의 경우 미군에 제공권을 장악당한 처지에서 하노이를 방어하기 위한 공군에 한해 파병을 허락했다. 북한은 2개 전대 200여 명의 조종사를 파병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중소 갈등이 심화하면서 중국은 북베트남에 소련과의 관계 단절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직후 중국은 군사지원단 철수를 단행하는 동시에 오히려 북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캄보디아 좌익 반군 크메르루지를 지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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