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마련 안 돼 임신중지 주수·방법 미정
기댈 곳은 커뮤니티뿐… 음지 불법 거래
최근 한 유튜버가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지(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실상의 살인 행위와 다를 것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낙태를 금지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기 전 임신 24주를 넘어가는 낙태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헌재 결정 후 5년, 정부와 국회가 대체 법안을 마련하지 않아 낙태를 둘러싸고 혼란스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도 이번 사태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낙태는 죄가 아니"라면서, 산모 못 돕는 정부
문제가 된 브이로그는 한 20대 여성의 36주 태아 낙태 경험담을 담았다. 만삭에 가까운 임신부가 낙태를 해준다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실제 수술 후 회복하는 영상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건복지부는 살인 혐의로 경찰에 해당 임신부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헌재 결정이 있기 전 34주 태아 낙태를 집도한 산부인과 의사의 살인죄를 인정한 2021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삼았다는 게 복지부 설명이다. 경찰은 실제 낙태 행위가 이뤄졌는지 등 사실관계부터 따져본다는 계획이다. 해당 영상은 지금은 삭제됐다.
의료 현장에선 이번 논란 자체가 낙태죄 폐지 이후 길어지는 제도 공백과 무관치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산모들이 잘못된 정보를 얻기 쉽고, 낙태 가능 주수나 수술법에 대한 오해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실제 정부 기관마저 위기 임신부들에게 적절한 안내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취재진이 16일 여성가족부와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이 운영하는 '임신·출산 갈등 상담' 창구에 △수술 가능 병원 △시술 가능 주수 △보호자 동행 여부 등을 문의하자 "직접 여러 병원에 전화해 각각 상담을 받으라"는 형식적인 답변만 반복됐다. 여가부 관계자는 "헌법 불합치를 받았지만 후속 조치가 없어 민감한 문제"라며 "병원마다 판단이나 해석이 달라 구체적 안내가 어려운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렇다 보니 산모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불확실한 정보를 '알음알음' 얻는 게 일반적이다. 낙태죄 폐지 이후 관련 수술 정보를 주고받는 전문 애플리케이션까지 생겨났는데, 적절치 않은 후기와 수술법 수만 건이 공유되고 있다. 특히 '24주 이상 낙태가 가능한 곳이 있느냐'는 문의글이 적지 않게 게재되고, 경험자들 댓글도 속속 달린다.
국내에선 판매가 금지된 알약 형태의 먹는 낙태약 미프진을 의사 처방없이 사서 복용하는 일도 벌어진다. 기자가 SNS를 통해 익명채팅방에서 접촉한 판매상은 "만삭인데 미프진을 복용해도 되냐"고 묻자 "며칠 더, 약을 좀 더 먹으면 된다"며 100만 원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을 해외 체류 중인 의사라 소개하며 "전문가 보장"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을 도왔다"고 회유했다. 통상 미프진은 임신 초기가 지나고 복용할 경우 낙태 실패 확률이 높고 부작용도 우려되지만 음지에서 '나 몰라라' 유통되는 실정이다. 미프진 유통에 관여하는 또 다른 상인은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없고, 홀로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는 미성년자가 주고객"이라며 "이런 취약점을 노려 가짜약을 파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임신중지 가능 시기에 대해 태아와 여성의 건강권을 고려해 구체적 기준을 만들고, 약물·외과 수술 등 임신중지 방식도 개념화해 산모들이 위법한 상태에 놓이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지난달 모자보건법 개정에 착수했다고 밝혔으나, 법안은 빨라도 해를 넘겨서나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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