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사망 1주기: 365일의 기록]
이종섭 결재 번복부터 꼬여버린 사건
외압 의혹, VIP 격노설로 옮겨간 쟁점
어머니의 호소는 정치와 정권에 묻혀
"유속도 빠르고 흙탕물인데 왜 물 속에 투입시켰는지. 장화에 물이 들어가면 걸음이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구명조끼는 왜 입히지 않았는지. 저희 아들은 수영도 못 하고, 몇 번 강습받은 게 전부인 걸로 아는데 수영 여부를 확인했는지…"
(채모 상병 어머니가 해병대에 보낸 편지)
결혼 10년 만에 시험관시술로 얻은 귀한 자식. 평소 운동을 좋아해 피트니스 트레이너를 꿈꿨던 건장한 아이. 그 아들이 거친 물살 속으로 휘말려 간지 1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아직 이렇게나 물어볼 게 많다. 수영도 못하는 아이를 누가, 왜, 구명조끼도 없이 물 속에 밀어넣은 거냐고. 어머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정부와 해병대에 묻고 또 묻는다.
해병대원 채모 상병은 지난해 7월 19일 경북 예천군 내성천에서 홍수 실종자 수색 작전 중 급류에 휩쓸렸다. 순직 1주기를 앞둔 지난달 11일 채 상병 어머니는 해병대에 보낸 편지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게 제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호소했다.
어머니의 답답한 심정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인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망 책임을 묻는 수사는 이제 막 경찰 단계를 넘었고, 책임 규명을 방해했다는 '수사외압 의혹' 수사는 아직도 초기 단계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 관계자, 국방부와 해병대의 최고위급까지 휘말린 외압과 구명로비 의혹이 이어지면서 사건은 이미 정치 쟁점이 됐고 장기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웠으면 끝났을 이 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누구의 잘못으로 꼬인 걸까.
이종섭 결재 번복부터 꼬였다
7월 19일 채 상병이 순직한 직후 조사에 착수한 해병대 수사단(당시 단장 박정훈 대령)은 7월 28일과 30일 각각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며 사건을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보고했다.
보고 때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장관 보고 이후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결재한 이 전 장관은 갑자기 7월 31일 이첩 보류를 지시했고, 그럼에도 박 대령은 8월 2일 사건 기록을 그대로 경찰에 넘겼버렸다. 국방부 검찰단이 같은 날 경찰에서 기록을 회수했고, 회수한 기록을 재검토한 국방부 조사본부는 '대대장 2명에게만 혐의가 있다'고 결론 내린 보고서를 8월 24일 경찰에 재이첩했다. 10월 6일 박 대령은 항명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단 결론이 뒤집히고, 장관 결재가 번복되는 '이례적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자, 사건의 본질은 '사망 책임'에서 '수사 외압' 쪽으로 넘어가게 됐다. 가장 큰 의혹은 '도대체 국방장관 마음을 하루 만에 바꾸게 한 이가 누구였냐'는 대목. 자연스럽게 대통령실 개입 의혹으로 이어지게 됐다. 박 대령이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VIP(대통령)가 격노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런 의혹은 더 커졌다.
사건 곳곳에 용산의 그림자
박 대령 군사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관계자 통화기록을 보면 외압 의혹 정황이 더 짙어진다. 이 전 장관은 윤 대통령 및 대통령실 관계자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 전 장관은 이첩 보류 지시 직전인 7월 31일 오전 11시 54분 대통령 경호처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박 대령에게 지시가 전달된 전후, 임기훈 대통령실 국방비서관과 국방부 수뇌부 간 통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8월 2일 박 대령 사건 이첩 후,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과 직접 통화한 기록도 세 차례 나왔다.
사망 책임은 경찰과 검찰이 수사하지만, 수사 외압 의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영역이다. 현재로선 전언 형태의 'VIP 격노설'과 통화 기록 등 의혹의 뼈대만 나온 상황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와 보고가 오갔는지는 공수처의 물증 확보와 소환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본류에 해당하는 '사망 책임 수사'는 1주기를 겨우 11일 앞둔 이달 8일에야 첫 관문을 넘었다. 경찰은 임 전 사단장을 빼고, 여단장·대대장·본부중대장·수색조장·여단군수과장 등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1년 전 이첩에서도 빠졌던 임 전 사단장이 이번 사법처리에서도 빠진 것을 두고 논란이 커졌고, 의혹은 엉뚱한 쪽으로 번지고 만다.
새로 피어난 의혹만 뭉게뭉게
본류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새롭게 난 가지에서 피어난 의혹들만 더 무성해졌다. 해병대 전우 모임의 '임성근 사단장 구명' 의혹이 대표 사례다. "VIP에게 얘기하겠다"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공범의 통화 녹취를 둘러싸고 '구명설'과 '허풍' 논란이 오가고 있고, 야권에선 김건희 여사 연루 가능성마저 제기하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여권에선 '제보공작설'로 맞불을 놓았고, 사건은 실체도 규명되기 전에 결국 정치 쟁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가진 공수처 입장에선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규모로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모습이다.
여기에 '채 상병 특별검사법'을 둘러싼 정쟁까지 더해지면서, 사건은 정권의 명운을 건 극한 대립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야당은 △특검법 통과 △수사 외압 의혹 규명 △이 전 장관 호주대사 임명 과정 조사 등을 통해 정권 공격에 열중하고 있고, 대통령실도 진실 규명보다는 야당 공세를 방어하는 데만 힘을 모으고 있다. 누구보다 단합이 잘 됐던 해병대 예비역들마저 둘로 쪼개졌다.
채 상병 사망 1년이 지났지만,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고 의혹만 나날이 커져가는 상황이다. "아들에 대한 공방이 마무리되고, 이후 아이만 추모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머니의 이 호소는 정치와 정권의 벽에 부딪혀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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