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휴가, 노사 간 자율로 정하는 임의 휴가
외가·재혼 가정·비정규직 대상 차별 합리화
빈소서 상주인 직원 괴롭히는 '장례 갑질'도
"사측과 진정 기구 '인식 감수성' 확립 중요"
“외조모는 회사 규정에 없어서 개인휴가를 쓰셔야 할 것 같은데….”
경북 대구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인환(가명·30)씨는 최근 회사로부터 이 같은 통보를 받고 황당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긴 그가 장례절차를 준비하기 위해 회사에 부고를 알렸더니 '조부, 조모상과 달리 외조부상, 외조모상은 회사 규정에 없어 3일의 경조휴가가 나오기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씨는 사내 홈페이지나 메신저를 통한 부고 공지, 부의금 20만 원과 조화도 받지 못했다.
장례 등의 경조휴가는 법에서 정하는 법정휴가가 아닌, 노사 간 자율적으로 정하는 임의 휴가다. 이에 회사 내 취업규칙에 따라 정해지는데 친가나 정규직에만 경조 지원을 하는 회사들이 있어 유족들을 두 번 울린다. 가족 구성원과 관련한 각종 법적 책임 및 권한을 부계에만 주는 호주제가 2005년 폐지된 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구시대적인 차별이 여전한 것이다.
김씨와 비슷한 피해를 당한 이들의 진정이나 민원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지난해도 외조모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경조휴가 등 차별을 받았다는 진정이 접수됐다. 당시 사측은 자체 인사위원회 의결에 따른 규정으로, 복리후생 차원의 조치라 외가까지 확대하는 건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권위는 "외조부모를 친조부모와 다르게 취급하는 행위는 부계혈통주의 관행으로, 가족 상황·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행위"라는 일관된 판단을 내놓고 있다. 부계 혈통의 남성 중심으로 장례가 치러질 거라는 고정관념은 평등권 위배라는 이유에서다.
부모 잃은 슬픔에 정규·비정규 따로 있나
장례를 둘러싼 논란은 외가와 친가 차별에 국한하지 않는다. 고용 형태는 나날이 다양해지는데, 사측이 마련한 취업 규칙이 여전히 정규직 중심으로만 정해져 있는 경우도 많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부친상을 당한 계약직 직원 A씨는 회사로부터 '정규직이 아니니 연차를 사용하고 장례를 치르라'는 답을 받았다. 조부상을 당한 파견직 직원 B씨도 회사 측에 직원들에게 지원되는 장례비 등을 요청했더니 "헤드헌팅 업체에 문의하라"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최혜인 직장갑질119 소속 노무사는 "정규직에 한해 경조휴가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다른 형태의 근로자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사측이)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일종의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장례 조문 자체가 괴롭힘이 된 사례도 있다. 부친상을 당한 회사원 C씨는 평소 온·오프라인에서 자신에게 폭언을 일삼던 회사 대표가 장례식장에서까지 행패를 부려 결국 사표를 냈다. 임직원을 대동하고 문상을 온 대표는 단체로 상갓집이 떠나가라 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상주 C씨 등의 영상을 찍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게시했다. 재혼 10년 차인 새아버지 쪽 조부가 돌아가시자 회사 임원이 "친아빠도 아닌데 왜 경조휴가를 주냐"며 연차로 바꿔 쓰도록 압박하고, 조문까지 막은 또 다른 사례도 단체에 접수됐다.
전문가들은 장례를 둘러싼 차별이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인식 감수성'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권위나 중앙노동위원회 등 차별 시정 기구들이 사내 구성원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진정이 제기된) 맥락 역시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비정규직 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등) 약자들이 겪는 고충이 사측에 충분히 전달돼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환경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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