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람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
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 버렸어요.”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밤을 꼴딱 새웠어요.” 작가가 독자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단편집을 냈을 땐 생각이 바뀌어서, 이 책만큼은 사이를 두고 띄엄띄엄 봐주길,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잠깐씩 숨을 골라주길 바랐다. 한 권의 책에 실려 있지만 각각 완전히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이야기 한 편을 충분히 소화하고 나서 다음 편을 보는 게 단편집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 생각해서다.
안그람 작가의 신작 단편 만화집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을 봤다. 다섯 편의 이야기를 ‘사이를 둔 것도 아니고 안 둔 것도 아니게’ 봤다. 한 편 읽고 여운이 남아 책장을 덮었다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책을 와락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는 말이다. 누가 보면 화장실이 급한데 줄 맨 뒤에 선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다릴까 말까. 다른 데로 갈까 말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책도 매력적이고, 눈을 떼고 여운에 잠기게 하는 책도 매력적인데 그 둘이 섞이기도 하는구나, 그러면 참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는구나, 싶었다.
첫 번째 이야기 ‘100 Brix’는 짧고 강렬하다. 나리의 남자친구는 흠잡을 데가 없다. 친구들이 농담으로 ‘외계인 아니냐’는 말을 던지자 나리는 의혹을 품게 된다. 진실을 알고 싶지만 직접 마주할 용기는 없는 나리에게 남자친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달콤함을 남긴다. ‘진지하고 싶지 않은 혜지씨’는 사람들로부터 매사 진지하다는 “감탄과 비난 사이” 어디쯤의 평가를 받는 주인공이 진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이어 공룡에 푹 빠진 유치원생이 공룡 화석이라며 파온 뼈가 왠지 수상쩍다던가(‘공룡의 아이’), 회계사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이세계로 건너가 늙은 용의 쓸모없는 황금을 처분하는(‘녹슨 금과 늙은 용’) 이야기가 종횡무진 펼쳐진다.
마지막 편이자 표제작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에 이르면 충격적이면서 매혹적인 서사가 기다린다. 어느 날 말하는 토마토가 강림해서 인간을 구원해주겠다고 한다. 토마토가 첫째 제자로 지명한 서마리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로서 추적기를 달고 매일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다. 그녀가 의지하는 종교는 마리에게 일어난 일이 신께서 “사랑하기에 선사한 시험”이고 “용서만이” 상책이라고 말한다. 모든 방법을 강구했음에도 전 연인의 보복을 피할 수 없게 된 마리는 토마토가 내민 기회를 움켜쥐기로 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이 대담하고 선뜩한 작품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을 것 같다.
진지하고 묵직하고 서늘하고 매혹적인, 때로 엉뚱하기도 한 다섯 편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면 사이를 두지 않고 단숨에 몰아 읽었어도 큰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나씩 다시 꺼내 읽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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