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헬싱키 협정
구소련을 포함한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정상이 1975년 8월 1일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헬싱키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헬싱키 협정(Helsinki Accords)에 서명했다. 의회 비준을 받아야 하는 조약(treaty)이 아니어서 국제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냉전 이래 미국·소련을 포함한 동서 진영이 다자 협상으로 이룬 첫 정치-외교적 성과였다.
회의는 원래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소련이 동유럽의 정치적 경계를 획정하기 위해 제안한 거였다. 하지만 냉전 양상이 격화하면서 대화 자체가 무의미했고, 소련의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침략-공산화 등 동유럽 팽창주의의 결과를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는 국가가 많았다. 1972년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조성된 제한적 데탕트 국면에 힘입어 73년 7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시작됐지만 쌍방 모두 열의는 없었고,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태로 궁지에 몰려 있던 닉슨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1974년 8월 집권하자 헨리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은 “의미 없는 좌파들의 연극”이라며 헬싱키 회담을 말렸다. 하지만 포드의 생각은 달랐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경제위기 등 후유증을 감당해야 했던 그는 전면적인 대치 국면을 우회하길 원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의지로 회담은 급물살을 탔고, 저 협정 덕에 안보·이념이란 냉전의 지상가치에 인권과 인도주의적 상호협력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동서 합의하에 설정됐다. 명목적으로나마 경제와 과학, 환경 분야 국제 협력의 기틀이 마련됐고, 종교와 신념의 자유를 포함한 인권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1971년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시작됐고, 72년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평화통일 3원칙이 포함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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