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베트남 몰려드는 중국 자본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 지난달 11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북동쪽으로 약 60㎞ 떨어진 박장성(省) 비엣옌현. 가장 큰 산업단지 중 하나인 꽝쩌우 산단에 들어서자 한자 간판을 단 공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중국 대표 태양광 모듈(패널) 기업 JA솔라(Solar), 전자제품위탁생산 기업 리쉰정밀(立讯精密·Luxshare), 중국 굴지의 전기 스쿠터 업체 야디(雅迪·Yadea) 등 대부분 중국 기업의 생산 시설이다.
박장성과 인접한 박닌성 꾸에보 산단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닌성은 삼성전자, 효성 등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한 지역이지만 몇 해 사이 중국 공장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산단 한쪽에 위치한 중국 전자기기 대기업 고어텍(Goerteck) 공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2015년 베트남에 처음 생산 기지를 세운 고어텍은 현재 40만㎡ 부지에 8개 자회사 공장을 두는 등 빠르게 세를 확장하고 중국인과 베트남인 노동자를 대거 빨아들이고 있다.
정문 앞에서는 고어텍 공장에서 일하려는 베트남인 30여 명이 이력서를 든 채 초조한 표정으로 입장을 기다리거나 채용 중개인들에게 ‘면접 팁’을 듣고 있었다. 인근에선 올해 베트남에 처음 진출하는 중국 최대 전기차 기업 비야디(比亞迪·BYD) 대리점 공사도 한창이었다.
중국 생산 시설이 늘고 중국인 엔지니어와 관리자, 가족이 대거 몰려들자 ‘차이나타운’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꾸에보 산단 인근 도쫑비 거리에는 중국 식당과 마트, 미용실, 카페, 중국어 학원, 중국인 대상 유흥 시설 등이 즐비했다. 한자로만 적힌 간판과 메뉴판도 많아 중국인지 베트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한 마트에 들어가자 중국 술과 과자, 식품 등 중국에서 가져온 제품이 가득했다. 위챗·알리페이 등 중국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는 물론, 위안화 결제까지 가능하다. 한 무리의 중국 남성들이 계산대에 서자 베트남인 직원이 유창한 중국어로 “오늘 1위안을 3,500동(약 191원)으로 친다. 환전을 해 오지 않았다면 위안화로 값을 지불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거리에서는 거주지와 상업 시설 임대를 알리는 한자 부동산 광고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중국 부동산 중개인 시에칭은 “박닌에 공장 시설을 임대하려는 중국 기업들의 문의가 잇따른다. 일부는 한국 제조 업체가 철수하면서 빈 공장을 인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베트남 투자액 전년 대비 78% 늘어
베트남, 특히 중국 국경과 인접한 북부 지역에 얼마나 많은 중국 생산 시설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통계는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4월 “북부 전체 공장 중 40%가 중국 소유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 지역에 중국 공장이 몰린 것은 중국 광시성, 윈난성과 맞닿아 내륙 이동이 쉽다는 이점과 베트남 각 지방성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 움직임이 맞물린 결과다.
중국 자본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으로 물밀 듯 밀려든다. 고어텍과 리쉰정밀은 베트남 사업 확장을 위해 각각 올해 초와 지난해, 박장성에 2억8,000만 달러(약 3,856억 원)와 3억3,000만 달러(약 4,544억 원) 추가 투입을 결정했다.
지난해 중국 대표 태양광발전 기업 톈허광넝(天合光能·트리나솔라)과 세계 최대 태양광 패널 제조업체 징커에너지(晶科能源, 진코솔라)도 베트남에 각각 4억2,000만 달러(약 5,782억 원), 5억 달러(약 6,884억 원) 투자를 발표했다.
올해 4월에는 중국 국영 체리자동차가 중국 자동차 회사로는 최초로 베트남 북부 타이빈성에 생산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기업의 대중 브랜드 오모다와 고급 브랜드 재쿠가 베트남 대기업 젤렉심코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형태다. 연간 20만 대를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이밖에 산둥 하오화(山東昊華) 타이어의 경우 5억 달러(약 6,877억 원), 징둥팡 과기(京東方 科技集團)는 2억5,000만 달러(약 3,442억 원), 알루미늄 합금 업체 산둥 촹신금속(創新金屬) 역시 1억6,500만 달러(약 2,272억 원)를 각각 들여 공장 설립에 나섰다.
베트남 기획투자부의 지난해 말 기준 대(對)베트남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를 보면, 싱가포르가 약 68억 달러(약 9조3,636억 원·총 등록자본금 기준)로 가장 많았다. 일본(65억6,600만 달러·약 9조427억 원), 홍콩(46억8,400만 달러·약 6조4,527억 원), 중국(44억7,090만 달러·약 6조1,591억 원)이 뒤를 이었다.
특히 홍콩과 중국의 투자액은 전년 대비 각각 110%, 77.6% 늘었다. 코트라 베트남 호찌민무역관 관계자는 “2022년 중국·홍콩의 대베트남 합계 투자액 비중은 전체의 17.1%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25%에 달했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이 싱가포르와 태국 자회사를 경유해 베트남에 우회 투자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만큼, 실질적인 중국 자본은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인들의 설명이다. 지난해 중국 본토의 신규 FDI 프로젝트 수 역시 707건(22.2%)으로, 같은 해 베트남이 유치한 전체 외국인 투자 프로젝트(3,188건) 중 최다였다.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이러한 투자 추세는 한국과는 대비된다. 물론 1988~2023년 한국의 누적 투자액은 858억 달러(약 118조1,895억 원)에 달한다. 여전히 한국은 해당 기간 베트남 FDI 총액의 18.3%를 차지하는 최대 투자국이다. 하지만 지난해 직접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약 9.8% 감소한 44억 달러(약 6조588억 원)에 그쳤다. 새 프로젝트 비율도 2022년 20.4%에서 작년에는 14.8%로 떨어졌다.
한국 기업 ‘인력 확보’ 전쟁
중국 기업들의 생산 기지 이전·투자는 미중 갈등 속 ‘출구 전략’으로 풀이된다. 코트라 베이징무역관 관계자는 “미국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 회피, 중국 기업의 신시장 개척 본격화와 공급망 구축 등이 베트남 투자 급증 이유”라고 설명했다. 미국이 대중 포위망을 조인 탓에 중국 본토에서 생산 리스크가 커지자 중국 기업들이 베트남을 대체 공급망 경로로 활용한다는 의미다.
2018년 하반기부터 미국이 중국산 수입품에 더 많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2017년 3%대였던 미국의 대중국 평균 수입 관세율은 2019년 20%대로 급상승했다. 추가 관세는 미국 수입 시장에서 중국산 제품의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국산 실리콘 웨이퍼, 가전, 가구 등 품목은 타 지역에 비해 25%의 추가 관세가 부과돼 가격 경쟁력이 크게 약화했다. 중국의 3대 주력 수출 품목 중 하나인 리튬이온 배터리의 경우, 중국산 수입 관세율이 베트남산의 3배 수준으로 뛰었다. 중국 제조 기업들이 미국의 추가 관세를 회피하기 위해 국경을 맞댄 베트남 북부로 내려오거나, 기존에 설립한 베트남 공장 생산 능력을 키우기로 한 셈이다.
중국 기업의 잇따른 베트남 사업 확대로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현장에서는 ‘인력 확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단순 노동자는 물론 사무실 보조 근로자와 엔지니어, 중간 관리자,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인력 빼가기가 난무하고, 따라서 한국 공장에서 일할 사람이 줄고 있다는 얘기다.
김형모 대한상의 베트남사무소 소장은 “중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입지를 늘리며 한국이 (투자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중국 기업의 업종이 상당 부분 겹친 데다 노동력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한국 공장에서 근무하던 인력이 새로 이전해 오는 중국 공장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 중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보다 약 5~10% 높은 임금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베트남 노동자들을 끌어모은다. 예컨대 삼성 등 한국 기업 공장에서 일할 경우 경력과 직책, 한국어 구사 능력에 따라 월 700만~1,200만 동(약 38만~65만 원) 급여를 받는다면, 중국 기업은 800만~1,300만 동(약 43만~71만 원)을 주는 식이다. 한국 공장 근무 경험이 있을 땐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한다는 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박닌성의 한 한국 공장 관리자는 “베트남인들은 한국인과 달리 애사심이나 소속감이 없고 이직이 잦다. 신입을 채용해 1년여간 교육을 거쳐 숙련 노동자로 만들어 놨더니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이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중간관리자급 현지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든 잡아 두려고 애쓰지만, 베트남 최저임금이 연 6~7% 상승하는 상황에서 이직을 막기 위해 중국보다 더 급여를 올리는 것도 여의치 않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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