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0주년 기획 : 한일 맞서다 마주 서다]
<1> 물리적 국경이 사라진 문화 영토
한일 문화, 단순 교류 넘어 '보더리스' 시대
일본선 K팝 기획사가 기획한 일본인 그룹 인기
한류드라마 공식 차용한 일드 '아이 러브 유'도 흥행
한국선 80년대 일본 히트곡에 뒤늦게 관심
대중음악, 드라마 외에 예능도 양국 협업 증가
'보더리스' 시대 이끄는 건 양국 Z세대
"대중문화가 양국에 대한 호감도 견인"
편집자주
가깝고도 먼 나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한국과 동등하게 마주 선 관계가 됐다. 활발한 문화 교류로 MZ세대가 느끼는 물리적 국경은 사라졌고, 경제 분야에서도 대등한 관계로 올라섰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정치 외교적 과제를 짚어본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가 작아진 걸 느낍니다. 한국식 카페에 가거나 한국 아이돌 가수처럼 옷을 입는 일본인이 늘었어요. 특히 일본 여성들이 그렇죠.”
지난 6월 일본 최대의 한인 상가가 있는 도쿄 신오쿠보역 인근에서 만난 20대 일본 여성 치바의 말이다. 신오쿠보역 상점가 곳곳에서 한국 문화를 만날 수 있었다. K팝 관련 상품을 파는 매장과 한국 화장품이나 액세서리를 파는 매장 옆에 ‘남대문식당’ ‘홍대주막’ ‘명품떡볶이’ 등 한국어 간판이 걸린 식당과 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NCT드림, 트레저, 방탄소년단 등 K팝 그룹 관련 이벤트를 하는 카페와 의류 매장도 많았다. 한국 음식을 먹으러 왔다는 대학생 오모리(19)는 “K팝과 한국 드라마 등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한국 패션을 많이 따라 한다”고 말했다.
'푸른 산호초' 대인기..."한일 경계 낮아지는 시대의 상징"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지 올해로 26년.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요즘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일본인 멤버가 있는 K팝 그룹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일은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두 나라의 문화가 교류 단계를 넘어 경계가 조금씩 지워지는 '보더리스(Borderless·경계가 없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한국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가 지난 6월 일본 도쿄돔 공연에서 부른 일본의 전설적 가수 마쓰다 세이코의 1980년 히트곡 ‘푸른 산호초(아오이 산고쇼·青い珊瑚礁)’가 두 나라에서 동시에 화제가 된 건 이 같은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대표 포털인 야후 재팬에 칼럼을 연재하는 도쿠리키 모토히코는 “뉴진스의 일본 데뷔는 일본과 한국 음악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양국의 경계가 녹아가는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대중음악을 기피했던 한국 방송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지난 4월 종합편성채널 MBN ‘한일가왕전’에서 스미다 아이코(17)가 부른 곤도 마사히코의 1981년 히트곡 ‘긴기라긴니 사리게나쿠(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화려하지만 자연스럽게)’ 영상은 유튜브에서 5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국내 TV 프로그램에서 일본어 노래가 방송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데, 일본 가수가 방송에서 일본어로 부른 노래가 화제를 모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K팝과 J팝 융합한 JK팝의 새로운 유행
한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은 최근 10년 사이 두드러졌다. 한국 가요기획사들은 K팝 그룹 제작 기술을 활용해 일본에서 기획한 그룹을 잇달아 선보였고, 그사이 일본인 멤버들로 구성된 K팝 그룹이 한국에서 데뷔하기도 했다. 또 일본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드라마가 한국에서 제작되고 있고, 애니메이션 강국인 일본에서 한국 웹툰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콧대 높던 일본 아이돌 산업에도 변화가 싹텄다. 보이그룹 비퍼스트처럼 K팝 제작 시스템에 자극을 받아 기획된 팀이 나왔고, K팝의 마케팅 방식을 도입하는 그룹들이 늘었다. 니쥬나 JO1, INI 등 한국 기획사가 일본에서 제작한 그룹들의 인기가 많아지자 ‘JK팝’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보이그룹 원 앤 온리(ONE N’ ONLY)처럼 한국 기획사가 기획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JK팝을 표방한 팀까지 나왔다. 한국 대중문화 전문 번역가이자 작가인 구와하타 유카는 “K팝이 일본 아이돌 그룹에 음악과 춤, 메이크업, 팬들과의 소통법, 마케팅 전략, 음악 판매 방식, 해외 시장을 고려한 영어 가사 쓰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한류드라마 벤치마킹한 '아이 러브 유' 히트
올 초 일본 지상파 T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아이 러브 유’도 보더리스 현상을 보여준다. 한국인 유학생을 연기한 채종협과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여성을 연기한 일본 배우 니카이도 후미가 호흡을 맞춘 이 드라마는 한류 드라마의 공식을 일본식으로 풀어내 큰 성공을 거뒀다. 나카지마 게이스케 프로듀서는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이태원 클라쓰’나 ‘사랑의 불시착’ 같은 한국 드라마에 빠진 일본인이 많고 K팝과 한식당도 인기였다"며 "그래서 한국 드라마를 배우면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러브 스토리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의 드라마 제작 협업도 늘었다. 하연수, 황찬성, 김무준 등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일본 드라마가 최근 일본에서 방영됐다. 배우 이세영은 일본 배우 사카구치 겐타로와, 한효주는 일본 배우 오구리 슌과 일본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춘다. SLL과 CJ ENM 등 한국 드라마 제작사들도 일본 방송사들과 손잡고 일본과 협업을 준비 중이다. 일본 협업과는 거리가 멀었던 예능 방송 분야에서도 협업 시도가 이어진다. MBN이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연애를 다룬 리얼리티 쇼 ‘혼전연애’를 제작했고, KBS는 일본 연예기획사 요시모토흥업과 함께 다음 달 ‘개그콘서트’를 일본 무대에 올린다.
한일 문화 '보더리스' 시대, Z세대가 이끈다
한일 문화 교류가 부쩍 활발해진 건 윤석열 정부 들어 과거사 등을 둘러싼 한일 정부의 갈등이 잠잠해지면서 양국 국민의 상호 호감도가 상승한 영향이 크다. 일본 공익재단법인 신문통신조사회가 올해 초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44%)는 1년 전(39.9%)보다 늘어 2015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좋아한다’고 답한 일본인 응답자는 37%로, 1년 만에 10%포인트 상승했다. 이 역시 2018년 이래 최고치였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 주역은 양국의 Z세대(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 출생)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15일 일본의 10대들이 한국 패션에 열광하는 현상을 조명했다. ‘패션에 참고하는 나라’로 10대 여성 응답자 4명 중 3명이 한국을 꼽았다는 소비자 동향 분석업체 결과를 보도하면서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커져 지난해 일본에서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 응시한 수험생은 2019년(2만7,000여 명)보다 50%가량 증가한 4만1,000여 명이었다.
윤 정부 출범으로 한일관계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한국의 Z세대들은 정치와 문화를 별개라고 보고 일본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긴다.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가 중심이었던 관심 분야도 넓어졌다. 일본 대중음악 선호도가 특히 커졌다. 지난해부터 요아소비, 아도, 킹누, 라드윔프스, 리사 등 일본 가수와 그룹이 줄줄이 내한 공연을 했는데, 티켓은 거의 매번 매진에 가깝게 팔렸다. 20대 최강윤씨는 “K팝 중심의 획일적인 국내 음악과 달리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게 일본 음악의 매력”이라면서 “일본 정부가 정치·외교적으로 도발한다면 ‘노재팬’(일본 불매 운동)에 동참하겠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일본 가수의 음악을 덜 듣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Z세대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와 모바일 기기를 통해 문화교류의 접촉면을 넓혔다. 어릴 때부터 한국인은 일본을, 일본인은 한국을 여행하고 체험하면서 이해의 폭도 실질적으로 넓어지고 있다. 박승현 계명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인식이 접점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중문화 소비가 서로에 대한 호감도를 견인하고 있다”면서 “이 같은 현상을 한일 관계 개선에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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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국경이 사라진 문화 영토
일본이 무시 못하는 '큰 손' 한국
혐오 줄었지만, 역사도 잊힌다
갈등과 공존, 기로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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