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갈등과 공존, 기로에 서다
尹 정부, 강제징용 해법 통해 관계 개선 물꼬
美 중재 통한 안보 협력 의존 땐 한계 뚜렷
불안한 한미일 리더십… '트럼프 리스크' 변수
"정치적 성과 아닌 국민적 신뢰부터 쌓아야"
편집자주
가깝고도 먼 나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한국과 동등하게 마주 선 관계가 됐다. 활발한 문화 교류로 MZ세대가 느끼는 물리적 국경은 사라졌고, 경제 분야에서도 대등한 관계로 올라섰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한일 관계의 현주소와 정치 외교적 과제를 짚어본다.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2024년 105주년 3·1절 기념사
한일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셈법은 늘 복잡하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가 뒷덜미를 잡아채고, 미국·북한·중국이 관여한 동북아 정세가 사방으로 당기는 변곡점에 서 있다. 정책의 일관성을 갖추려 해도 국내 정권의 성향과 외부 변수에 따라 출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래서 '멀고도 가까운' 관계로 불렸다. 윤석열 정부 들어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다. 미국의 중재 역할이 컸다. 조 바이든 대통령 주도로 한미일 3국 정상이 뭉친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를 통해 한일관계의 전환 시그널이 뚜렷해졌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윤 정부가 미국 주도의 안보 공동체에 올라타며 일본과 과감하게 손을 잡았지만, 공교롭게 한미일 3국 정상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한 상태다. 당장 9월 일본은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고 미국 역시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 매듭 풀며 12년 만에 맞이한 한일 해빙기
윤석열 정부는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 및 독도 방문 이후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10여 년 만에 개선했다고 자평해왔다. 과거사를 딛고 일본과 미래를 위한 파트너가 됐다며 호평 일색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의 비교우위를 강조한다. 2019년 7월 '한일 무역분쟁'이 결정타였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됐고, 정부도 상당 부분 이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이어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를 주장하더니 급기야 2020 도쿄 올림픽 보이콧까지 거론됐다.
윤 정부는 최대 걸림돌을 대일관계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일본 전범기업들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지난해 초 '제3자 변제안'을 내놓으며 일본과 화해의 물꼬를 텄다. 2011년 이후 끊긴 셔틀외교가 재개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20여 년 만에 양국 정상이 도출한 인상적인 성과다.
'강력한 중재자' 미국 중심 안보협력의 한계
하지만 한일 양국의 자력으로는 버거웠다. 급속한 관계 개선 이면에는 미국과 인도·태평양 전략이 있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일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윤석정 국립외교원 교수는 "실제 미국 바이든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관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인태전략 보고서'는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으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이처럼 미국 주도의 한일 협력은 상황과 변수에 따라 약점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올 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미일 안보협력의 한계와 취약점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먼저 한국의 경우,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부정적 여론이 우세하다. 3국은 안보협력 확대에는 적극 동조하면서도 우선순위가 서로 다르다. 미국은 대중 전략 수행을 위한 동맹 네트워크 구축이, 한국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는 게 최우선 과제다. 반면 일본은 3국 협력을 기반으로 해양 안보 강화와 미일동맹 내 역할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군국주의 부활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3국이 모두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서로 다른 역사적·문화적 배경 탓에, 가치에 기반한 공동행동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흔들리는 한미일 리더십… 불안한 '3인 4각'
견고한 국민적 지지와 신뢰보다, 3국 수장의 정치적 결단에 의존하는 점도 한미일 협력의 불안요인이다. 정치적·현실적 필요에 의해 묶인 '3인 4각' 달리기는 언제든 느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일본의 리더십은 올 하반기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한일 사이에서 강력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온 미 민주당 정부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11월 대선에서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출마를 포기한 이상,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한미 간 '브로맨스'는 과거형이 될 공산이 크다. '트럼프 리스크'로 불리는 불확실성은 명실상부 한미일 공조의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치러야 한다. 한일 관계 복원 등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던 기시다 총리는 정치자금·특정 종교 유착 논란·자민당 소속 정치인들의 일탈 등 악재가 겹치면서 지지율이 그리 높지 않다. 일본 주요 언론이 지난달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는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대부분 20%대를 기록했다. 그나마 윤석열 대통령은 아직 절반의 임기를 남겨두고 있지만, 미국과 일본의 정상이 현재와 전혀 다른 성향으로 바뀐다면 당장 우리의 대미·대일 전략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한일, 진정한 한배 타려면 '안보협의체' 필요"
전문가들은 북러가 군사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상황에서 한미일 공조와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단기적 성과가 아닌 국민적 신뢰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야 지속가능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대일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에게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체계적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장기적인 시각으로 동북아 지역의 '안보 협의체'를 구성하는 수준의 제도화를 이뤄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며 "5년짜리 외교 정책으로 상대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도록 일관된 메시지를 낼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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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공존, 기로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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