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9단, ‘국수산맥’ 결승서 라이쥔푸 8단에 무릎
‘2022 항저우AG’, 쉬하오훙 9단에 패배 재소환
한·중·일 반상 삼국지 ‘흔들’…’신 사국지’ 오나
인공지능(AI) 도입, 기력 상향 평준화 뚜렷
“너무나 충격적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에도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했다. 지금까지 세계 바둑계에선 변방의 ‘언더독’으로 치부됐던 대만발(發) ‘K바둑 쇼크’였기에 내상은 더 컸다. 지난 5일 바둑TV와 K바둑에서 한국 신진서(24) 9단과 대만 라이쥔푸(22) 8단의 ‘제10회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우승상금 1억 원) 결승전을 생중계한 해설위원들의 이구동성이다. 인공지능(AI)과 가장 유사하다고 평가, ‘신공지능’으로 알려진 신 9단의 이날 패배가 굳어진 대국 종반 무렵부터 해설위원들 사이에선 “믿을 수 없다”란 탄식만 이어졌다.
대만 바둑이 글로벌 반상(盤上)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존재감조차 미미했던 세계 대회를 통해 확실한 눈도장까지 찍고 나서면서다. 특히 중요한 길목에서 세계 랭킹 1위인 신 9단을 연거푸 저격, 이슈몰이에도 성공한 모양새다. 신 9단은 앞선 지난 ‘2022년 항저우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개인전 준결승에서 대만 바둑의 간판스타인 쉬하오훙(23) 9단에게 패배, 결승 진출에 실패한 바 있다.
6일 한국기원에 따르면 전날 펼쳐진 ‘제10회 국수산맥’ 대회 결승전에서 신 9단은 라이쥔푸 8단에게 반집 차이로 패했다. 신 9단은 초반부터 흐름을 주도했지만 종반 끝내기 부문에서 안이한 착수로 결국 역전패까지 허용했다. 특히 AI 승률 그래프로 90% 이상 유리하게 가져갔던 막판 판세가 뒤집혔단 측면에서 신 9단에겐 뼈아픈 흑역사로 남게 됐다. 대국 도중, 분위기가 넘어간 순간부터 신 9단도 연신 자신의 머리와 뺨을 가볍게 터치하거나 허공에 눈을 돌리면서 연신 초조한 모습까지 드러냈다.
신 9단의 이날 아픈 패배에 이목은 모아졌지만 주목도는 대만의 약진세에 더 쏠렸다. 국수산맥 대회는 상금이나 참가 규모 등에선 세계 메이저 기전보단 한 단계 아래로 평가되지만 참전한 선수들의 면면에선 무게감이 상당했다. 당장, 한국과 일본의 경우엔 자국 내 톱랭커들이 총출동했다. 1~4위(8월 기준)인 신 9단과 박정환(31) 9단, 신민준(25) 9단, 변상일(27) 9단 등이 출전했다. 이들은 모두 세계 메이저 기전 타이틀을 따냈던 초일류급 선수들이다. 일본 역시 자국 내 ‘스리톱’(1~3위)으로 알려진 이치리키 료(27) 9단과 시바노 도라마루(27) 9단, 이야마 유타(35) 9단 등이 동참했다. 중국에서 또한 쟁쟁한 실력을 갖춘 판팅위(28) 9단과 자오천위(25) 9단, 왕싱하오(20) 9단 등이 참가했다. 대회 시작 전부터 바둑계 안팎에서 쉬하오훙 9단과 라이쥔푸 8단으로 구성된 대만의 우승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본 배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전 쉬하오훙 9단이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깜짝 등장했지만 그동안 세계 바둑 무대에서 주연은 주로 한국과 중국에, 조연은 일본에 돌아갔다. 반면 대만의 역할은 희미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 대만의 세계 메이저 대회 우승은 지난 2007년 ‘LG배 기왕전’(우승상금 3억 원)에서 당시 27세로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 저우쥔신 9단 이후 전무했다. 숱한 세계 메이저 대회에서 4강이나 8강 진입은 고사하고 첫판에서부터 패배하고 짐을 쌌던 게 대만이다.
그랬던 대만이 쉬하오훙 9단과 라이쥔푸 8단을 내세워 주요한 외나무다리에서 잇따라 현재 권력인 신 9단 저격에 성공, 갑자기 분위기 반전까지 가져온 저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AI에서부터 원인을 찾았다. 바둑TV 해설위원인 박정상(37) 9단은 “기본적으로 바둑 기력은 고수들의 합동 연구로부터 향상되는 게 일반적이다”라며 “과거, 초일류급 선수들을 찾아볼 수 없었던 대만이 이처럼 단기간에 세계 무대에서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AI를 빼놓고선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K바둑 해설위원인 백홍석(38) 9단도 “대만 선수들의 바둑이 예전과 달리, 상당히 탄탄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AI의 조력을 확실하게 받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전했다.
AI와 결합된 체계적인 바둑 교육 시스템도 대만 바둑의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2000년대 중·후반 대만에서 프로바둑 기사로 활약했던 유경민(43) 6단은 “타이베이 시내 중심엔 바둑 특기생으로 진학이 가능한 중·고교가 있는데, 대만 바둑의 저변 확대에 도움을 주고 있다”며 “프로지망생과 입단대회를 책임진 해봉기원이 AI를 활용한 훈련까지 집중적으로 진행하면서 대만 바둑의 기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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