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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32도, 땀 비오듯… 온열질환에 노출된 택배기사들 [폭염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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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32도, 땀 비오듯… 온열질환에 노출된 택배기사들 [폭염현장]

입력
2024.08.12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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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창고엔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비치
점심도 거르고 오후 3시까지 배송작업
사업자 분류... 극한상황 근로 거부 못해

8일 오전 6시 서울 광진구의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택배기사 지씨가 배당된 택배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냉방시설은 기둥에 위치한 선풍기가 전부다. 오세운 기자

8일 오전 6시 서울 광진구의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택배기사 지씨가 배당된 택배 물품을 분류하고 있다. 냉방시설은 기둥에 위치한 선풍기가 전부다. 오세운 기자

8일 오전 6시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우체국 택배 물류창고. 대부분 직장인들에겐 아직 출근시간도 전이지만, 후끈 달아오른 창고 안에서 중장년 남자 몇몇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겨우 해가 뜬(이날 일출 오전 5시 45분) 이른 시간임에도 실내 기온은 벌써 28도, 습도를 감안한 체감온도는 32도다. 그럼에도 창고 안엔 에어컨은 없었고, 대형 선풍기만 작업자들의 땀을 식혀줄 뿐이다. 8년 차 택배기사 지모(46)씨는 "여름엔 실내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오히려 바깥이 더 시원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본보 기자는 이날 하루 동안 지씨와 동행하면서 폭염 속 온열질환에 고스란히 노출된 야외 노동자의 작업 환경을 함께 경험했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이날 낮 최고온도는 35도에 이르렀고, 때때로 소나기까지 내려 푹푹 찌는 찜통더위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오전 7시 반에 옷 갈아입어야

상하차 작업을 하던 지씨가 땀이 계속 흐르자 안경을 벗은 채 일을 하고 있다. 화물칸은 성인 남성 신장보다 작아 지속적으로 몸을 숙이면서 일 해야한다. 오세운 기자

상하차 작업을 하던 지씨가 땀이 계속 흐르자 안경을 벗은 채 일을 하고 있다. 화물칸은 성인 남성 신장보다 작아 지속적으로 몸을 숙이면서 일 해야한다. 오세운 기자

일은 물류 분리 작업부터 시작된다. 여름 휴가철이라 택배 비수기고 일주일 중 택배 물량이 적은 편인 목요일이지만, 지씨에겐 200여 개 물량이 배정됐다. 20㎏에 달하는 농수산 식품 박스도 적지 않았다. 일을 시작한 지 15분 만에 콧잔등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다음은 짐을 차 안으로 옮기는 상차 작업. 그냥 몸만 쓰는 작업이 아니라 예상 동선과 화물 부피 등을 고려해 '테트리스'(화물 끼워넣기)를 잘해야 한다. 택배기사는 성인 키보다 낮은 택배트럭 화물칸을 오르내리며 허리를 숙인 채 200개 화물을 일일이 날라야 한다. 자연히 온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지씨는 "여름엔 화물칸 온도가 40도에 육박해 짐 싣고 내리는 과정이 매우 고되다"고 말했다. 물건을 모두 실은 시간은 오전 7시 30분. 지씨는 벌써 땀에 젖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전 8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서 배송이 시작됐다. 배송지 건물에선 환기가 되지 않아 로비와 복도가 실외보다 더워 숨이 막힐 정도. 따라간 기자도 배송 시작 30분만에 몸 전체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됐다. 소나기가 내렸지만 우산은 언감생심이다. "비 오면 그냥 맞으면서 일해야죠. 비가 오나 태풍이 오나 업무는 똑같거든요."

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 소나기가 내리자 지씨가 비를 맞으며 뛰어가고 있다. 오세운 기자

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 소나기가 내리자 지씨가 비를 맞으며 뛰어가고 있다. 오세운 기자


작업중지권? 그림의 떡이죠

하루 중 숨을 돌릴 시간은 오전에 한 번 택배 차 앞에서 5분 정도 음료수를 마시는 게 다였다. 정부는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라인을 통해 체감 온도가 33도 이상 오르면 시간당 10분 휴식 시간을 제공하라고 권하지만, 시간이 생명인 택배기사들에겐 휴식은 사치다. 택배기사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건당 수수료를 받으면서 일하지만, 고객 민원이나 유무형의 불이익을 감안하면 임의로 작업을 중단할 수 없다. 지씨는 "택배기사는 자영업자면서도 사실상 일감을 제공받는 특수고용노동자"라며 "아파서 쉬면 그날 일당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점심도 거른 채 배송은 이어졌다. 일 시작 9시간이 넘어 오후 3시를 지나서야 업무가 모두 종료됐다. 직접 배송 경로를 따라다녀 보니,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무더위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고 발가락엔 물집까지 잡혔다. 지씨가 이날 업무 시작시점부터 퇴근까지 측정한 걸음 수는 2만1,668보, 운전 거리는 20㎞였다. 족저근막염을 달고 사는 그는 신발도 밑창이 자꾸 닳아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한다.

이런 고된 강도의 일을 8년째 해온 지씨도 올해 여름 더위엔 혀를 내둘렀다. "여름철 한낮에 일하면 당이 떨어질 때처럼 순간 머리가 핑 돌 때가 종종 있어요."

폭염·폭우·혹한 상황에서도 배송을 멈추지 못하는 택배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서도 일을 강행하다 보니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9일 경북 경산시에서 40대 여성 택배기사가 폭우 속 근무 도중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고, 이달 7일엔 대전의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30대 작업자가 상하차 중 열사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산업재해나 중대재해의 위험이 있는 경우 근로자 스스로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작업중지권)가 보장되어 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이 권리를 보장하고 있어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노동자에겐 그림의 떡이다. 한선범 전국택배노동조합 정책국장은 "택배는 기본적으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서 "당일 배송을 못 하더라도 페널티를 부과하지 않는 방식 등 택배기사들에게 일부 여유를 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일 택배기사 지씨가 오후 3시까지 걸은 걸음 수. 지씨는 매일 평균 2만보에서 4만보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8일 택배기사 지씨가 오후 3시까지 걸은 걸음 수. 지씨는 매일 평균 2만보에서 4만보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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