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소설집 ‘투계’
가부장제가 은폐한 가정 내 여성폭력 그려
“폭력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내는 인물들”
한때 어떤 여자아이들은 ‘싸움닭’이라고 불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라나면서 “굉장히 사납고 시끄러운” 존재를 가리키는 이 별명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고는 “남자들에게는 항상 네, 하고 말하는” ‘여성’으로 거듭난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장”일 테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모든 대륙에서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다. 에콰도르에서 태어난 작가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가 2018년 낸 첫 소설집 ‘투계’는 가부장제에서 계속돼 온 여성의 모멸과 폭력의 역사를 폭로하려는,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은 싸움닭의 시도다.
여성이나 괴물이냐…여자애들의 성장
“그만 좀 해, 계집애처럼 굴지 말라고.”
소설집의 첫 작품 ‘경매’에서 투계꾼인 아버지는 딸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돌봐줄 사람 없는 마초의 공간인 투계장에서 ‘아저씨들’의 성폭력에 노출되던 딸은 안고 가던 닭의 배가 터지자 “그 아저씨들이, 죽은 닭의 창자와 피와 닭똥을 보고는 구역질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후 얼굴에 닭 창자와 혈변을 바르고, 줄줄이 엮은 닭 대가리를 치마 속에 넣어둬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여성성을 버리고 괴물의 길을 택한 이들만이 누리는 '호사'다.
암푸에로의 세계에서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이처럼 무자비한 환경에 놓인 채로 성장을 앞두고 있다. 이들의 성장은 굴복, 굴종이며 사실은 몰락에 가깝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방관자인 수록작 '괴물'의 가정에서 가사도우미는 생리를 시작한 쌍둥이 자매에게 일러둔다.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뱀파이어, 악마보다 정원사 아저씨를 더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자매에게 그는 울면서 덧붙인다. “이제 여자가 된 거야.”
그로테스크한 폭로의 순간들
여성의 성장이 공포가 된 건 착취적인 가부장제와 이를 외면하는 사회 탓이다. 성경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나사로의 부활’ 일화를 비튼 수록작 ‘상중’에서 암푸에로는 “성인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성인”마저도 개입하지 않으려는 가정폭력을 묘사한다. 동료와 새끼를 죽이거나 먹는 햄스터의 카니발리즘과 집 안에 들끓는 바퀴벌레, 내장이 터진 닭, 토사물과 분변 등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여기에 꿰어 낸다.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지만 굳이 수면 위에 드러내지 않는 폭력을 눈앞에 들이대는 순간은 잔혹하고 역겹다.
암푸에로는 올해 6월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남성 기자들이 내가 ‘공포소설’을 쓰는 이유를 물었다”면서 “여성은 공포의 진원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은 공포영화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다. 멕시코에서만 하루 11명의 여성이 살해당할 정도로 ‘마초의 대륙'인 라틴아메리카의 여성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피해자 아닌 생존자의 외침
암푸에로의 소설은 연약한 피해자의 호소에 그치지 않는다. “피투성이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지독하고 끈질기게 삶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소설 속 인물들은 실제로 이 세계를 견디는 수많은 ‘약한’ 사람들”이라는 이라영 예술사회학자의 추천사처럼 여성들은 생존자다. 암푸에로는 ‘투계’ 이후로도 가부장제의 폭력을 고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는 '투계'가 처음 소개되지만, 암푸에로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최근 나온 암푸에로의 산문집 ‘내장(內臟)의(Visceral)’는 성폭력을 비롯해 그의 자존감을 무너뜨린 과거의 시간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엘 파이스와의 인터뷰도 이 작품 출간을 계기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던진 암푸에로의 한마디는 통쾌하다. “개자식들아. 나는 살아남았고, 개자식들은 누구도 엘 파이스와 인터뷰를 할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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