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 지옥이 된 바다 2부>
③ 살고 싶어요
해양 보존 단체 '프로오션' 귄터 대표 인터뷰
처리 인프라 부족 탓 폐기물 바다로 흘러가
기업들, 알면서도 끊임없이 일회용품 판매
쉽게 분해되거나 지속 가능 포장재 내놔야
"자본이 진실 외면하면서 현실은 가혹해져"
편집자주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혀 피 흘리는 바다거북, 뱃속에 찬 쓰레기 탓에 죽은 향유고래. 먼바다 해양 생물들의 비극은 뉴스를 통해 잘 알려졌죠. 우리 바다와 우리 몸은 안전할까요? 한국일보는 3개월간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를 찾아 다녔습니다. 동해와 서해, 남해와 제주에서 어부와 해녀 63명을 만나 엉망이 된 현장 얘기를 들었고, 우리 바다와 통하는 중국, 일본, 필리핀, 미국 하와이를 현지 취재했습니다. 지옥이 된 바다. 그 가해자와 피해자를 추적했습니다.
필리핀은 전 세계에서 바다로 플라스틱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국가로 꼽힌다. 비닐봉지, 일회용 포장재, 페트병처럼 쓸모를 다한 뒤 하천이나 해변으로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간 게 주된 요인이다.
그렇다면 해양 오염 책임을 쓰레기를 마구 버린 필리핀인들에게만 물어야 할까.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해양 보존 단체 ‘프로오션’의 바스티안 귄터(32) 설립자 겸 대표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필리핀이 최악의 해양 쓰레기 배출 국가가 된 것은 개인이 아닌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했다는 의미다.
그는 지난달 2일 필리핀 중부 네그로스섬 네그로스 오리엔탈주(州) 최남단 시아톤시를 찾은 기자와 만나 “필리핀 소비자에게 폐기물 처리 대안이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생산·판매 활동을 이어가는 다국적 기업들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들 기업에 책임을 묻지 않고는 해양 쓰레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형 쓰레기 집하 인프라 부족 탓 '쓰레기 천국' 오명
프로오션은 독일인 귄터 대표가 필리핀 바다와 해양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 2019년 독일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네그로스섬 현지 주민을 정직원으로 고용해 해양 폐기물을 줍고 △이를 재활용하거나 적절하게 처리하고 △지역 아동들에게 해양 생태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직원들은 일주일에 6일 네그로스섬 해변과 하구, 맹그로브 숲을 다니며 바다에서 밀려온 쓰레기를 손으로 수거한다. 해안 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플라스틱이 바다로 다시 유입되거나 미세 플라스틱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프로오션이 지난 5년간 네그로스섬 남부 해안선 150㎞를 따라 수거한 해양 쓰레기는 200톤이 넘는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비닐과 일회용 포장재 등 플라스틱 쓰레기다.
귄터 대표는 필리핀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 최다 배출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로 ‘인프라 부족’을 꼽았다. ①필리핀 내 고형 쓰레기 집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②쓰레기 처리 시설이 갖춰진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싶어도 7,600개에 달하는 섬 사이를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적법한 처리 없이 바다에 버려지도록 '나쁜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의미다.
"다국적 기업, 책임 있는 해법 고민해야"
귄터 대표는 쓰레기를 버리는 필리핀 사람들도 문제가 있지만, 인프라 미비로 쓰레기 처리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면서도 필리핀에 끊임없이 일회용 소포장 제품을 내놓는 다국적 기업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필리핀인들은 손바닥보다 작은 비닐봉지에 1회 분량으로 저렴하게 파는 샴푸, 세제, 치약, 식음료 등을 조금씩 자주 구매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이런 수요를 노리고 다량의 소포장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소비된 포장재는 결국 필리핀 바다를 '쓰레기 지옥'(아래 연관 기사 참고)으로 만들고 있지만, 기업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게 귄터 대표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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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2017년 5월 필리핀 마닐라만(灣)에서 수거한 5만4,000여 개 플라스틱 쓰레기 중 상당수도 스위스 식품업체 네슬레, 네덜란드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 미국 생활용품 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 코카콜라 등 다국적 기업의 잔재였다.
귄터 대표는 “다국적 기업들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윤리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며 “쉽게 생분해되거나 지속 가능한 포장재를 내놓는 등 책임 있는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프로오션이 해양 오염에 일조한 다국적 기업들에 해안 청소 동참을 요청했지만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부 회사는 묵묵부답이었고, 어떤 곳은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귄터 대표는 “각 회사들은 홈페이지에선 ‘플라스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홍보하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를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며 "자본이 진실에 눈을 감는 사이 현실은 더욱 가혹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팀장 : 유대근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 진달래·원다라·이서현 기자(엑설런스랩), 조영빈(베이징)·허경주(하노이) 특파원, 한채연 인턴기자
사진 : 이한호·최주연·정다빈 기자
영상 : 박고은·김용식·박채원 PD, 제선영 작가, 이란희 인턴PD
※<제보받습니다> 한국일보는 해양 쓰레기 문제를 집중 취재해 보도해 나갈 예정입니다. 해양 쓰레기 예산의 잘못된 사용(예산 유용, 용역 기관 선정 과정의 문제 등)이나 심각한 쓰레기 투기 관행, 정책 결정 과정의 난맥상과 실효성 없는 정책, 그 외에 각종 부조리 등을 직접 경험했거나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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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쓰레기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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