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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서 그림으로 도피하려는 당신께 풍경화를 권합니다

입력
2024.08.29 10: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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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풍경화의 비밀(3): 베네치아 르네상스 풍경화

편집자주

좋은 예술 작품 한 점에는 질문이 끝없이 따라붙습니다. '양정무의 그림 읽어드립니다'는 미술과 역사를 넘나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여러분의 '미술 지식 큐레이터'가 되어 그 질문에 답하는 연재입니다. 자, 함께 그림 한번 읽어볼까요.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이정명의 장편소설 '바람의 화원'에 나오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첫 대화다.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른다'는 주장은 흥미롭게도 서양 미술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코린토스에서 도기를 구워 팔던 도공의 딸 디부타데스는 연인이 전쟁에 나가게 되자 그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잠든 모습을 호롱불로 비춰 그림자를 따라 그렸다. 이것이 그림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림은 그리움이라는, 다시 말해 존재의 부재함과 결핍에 대한 대체물로 동서양 모두에서 미술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풍경화의 등장을 설명할 때 잘 맞아떨어진다. 풍경화는 자연이 화면 한가득 펼쳐져 있는 그림으로, 한국에선 전통적으로 산수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상상적인 풍경이 아닌 눈앞에 당장 보일 듯한 사실적인 풍경화, 소위 '실경(實景·realistic landscape)'을 담은 풍경화는 미술사에서 상당히 늦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풍경의 부재가 불러온 풍경화

위성이 찍은 베네치아섬. 위키피디아

위성이 찍은 베네치아섬. 위키피디아


서양에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실경 풍경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한국에선 겸재 정선이 활동한 18세기에 비로소 실경의 시대가 열린다. 풍경화가 다른 미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등장하는 건 왜일까. 우선 풍경화가 도시적 현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도시화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자연과 분리될 때 사람들은 풍경을 동경하게 되고, 바로 이때 풍경화가 자연의 대체물로서 독립적인 장르로 등장하게 된다. 이 때문에 풍경화는 상당히 역사적으로 뒤늦게 발전했다. 결국 풍경화는 근대적 산물이다.

풍경화가 풍경의 부재에서 시작한다는 논리를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다. 베네치아는 석호에 자리한 섬으로, 지중해 무역을 이끌면서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큰 번영을 누렸다. 우리가 '역사 지구'라고 부르는 베네치아 본섬은 15~16세기 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에 비해 인구 밀도가 두 배 가까이 될 만큼 인구가 과밀한 된 곳이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는 육지와 분리된 섬이면서 도시화가 밀도 높게 진행된 까닭에 자연을 동경하는 베네치안인들의 욕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풍경이 크게 강조된 그림들이 속속 등장한다.

먼저 주목할 작품은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붙잡히기 직전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리는 성경의 한 장면을 담았다. 예수의 앞에는 정신없이 잠든 3명의 제자가 보이고, 배경에는 로마 병사들을 이끄는 유다의 모습이 보인다. 동시에 화폭 속에 넓게 펼쳐진 풍경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기도하는 예수 바로 뒤에 잿빛 먹구름이 물러서면서 하늘이 붉게 달아올라 오는 것으로 보아 화가가 동트는 새벽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반니 벨리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1458-6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조반니 벨리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1458-60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위키피디아


수수께끼 같은 베네치아 풍경화

조르조네, 템페스트, 1508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조르조네, 템페스트, 1508년경,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풍경화의 태동을 알린 이 작품이 등장한 후 풍경이 강조된 흥미로운 그림 한 점이 다음 세대에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조르조네가 그린 '템페스트(폭풍)'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1508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주제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그림 속 전면에 자리한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들이 누구인지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여성이 옷을 입고 있었다면 이집트로의 피신이라는 기독교 도상으로 읽을 수 있었겠지만, 여성이 나체로 아이의 젖을 먹이고 있어 주제가 알쏭달쏭해진다. 건너편에 창을 들고 있는 남자와의 관계로 봤을 때 일각에서는 에덴동산에서 나온 아담과 이브로 보기도 하고, 당시에 유행한 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린 화가 조르조네는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흑사병으로 요절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악기 연주도 잘하고 예의범절도 뛰어나 베네치아의 젊은 귀족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하는데, 이로 짐작해 보았을 때 그의 그림은 당시 기준으로 베네치아 신세대 문화와 정서를 담아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지만 배경의 자연환경이 크게 그려진 점 때문에 풍경화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곳곳에 제목처럼 폭풍이 막 몰아칠 듯한 분위기가 담겼다. 강한 비바람에 나무는 좌우로 마구 흔들리며, 먹구름으로 사방이 어두워지는 순간 멀리 하늘에서는 번개가 섬광처럼 번뜩인다.

이미 고도로 밀집된 도시에서 살아간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이와 같은 풍경 그림을 보며 자연을 그리워했을지 모른다. 당시 베네치아 정세가 위태로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처럼 폭풍이 몰려오는 상황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담아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날씨의 변화와 함께 자연 풍경이 크게 강조된 그림이 베네치아에서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그림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라는 두 대가가 함께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풀밭 위의 콘서트'라는 작품이다. '템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림의 한쪽에는 옷을 입고 있는 남자 인물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이들 맞은편에 있는 두 여성은 나체의 몸으로 이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얼핏 보면 등장인물 모두 풀밭에서 함께 연주하는 듯하지만, 시선으로 봐서는 남성들은 앞에 있는 여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때문에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을 숲속 요정인 님프로 보기도 한다. 두 남성이 숲에서 연주할 때 요정이 등장해 같이 함께 음악을 즐긴다는 평화롭고 낭만적인 설정인 셈이다. 배경에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풍부한 노을이 한가득 펼쳐져 있다.

티치아노, 풀밭 위의 콘서트, 1510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티치아노, 풀밭 위의 콘서트, 1510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동심을 파괴하는 현대의 풍경화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2~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2~1863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베네치아 그림의 신비한 분위기를 제거하고 사회적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남성들은 당시 신사들의 복장이고, 전면의 여성은 막 옷을 벗은 듯 그림 앞쪽에 옷이 음식과 함께 널브러져 있다. 누가 봐도 이 여인은 거리의 여인이다. 그리움은 그리움답게 모호하게 그려져야 한다. 그런데 마네는 구체적인 인물을 거칠게 등장시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풀밭 위의 점심'은 성매매를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설정을 낭만적인 전원 풍경 속에 펼쳐서 폭로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이제부터 풍경화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고정관념을 깨는 실험의 장이 된다. 실제로 마네의 인상주의를 뒤이어 등장하는 야수파나 입체주의도 풍경화를 통해 새로운 미술을 선보였다.

어떤 그림보다도 그리움이 애틋하게 담겨야 할 풍경 속에 시각적 실험이나 사회적 부조리함이 끼어들면서 역사적으로 미술에서 순수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낭만적인 풍경화가 현대에는 도리어 동심 파괴의 장으로 사용된다는 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을 그리움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풍경화는 최고의 감상 대상이 된다. 특히 수수께끼 같은 베네치아 르네상스 풍경화는 낭만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아름다운 시각적 도피처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미술은 여전히 부재함에 대한 근사한 대체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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