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빌런드 스미스(Haviland Smith, 1929.8.25~2024.6.20)
영국 작가 존 르카레(John le Carre, 1931~2020)의 만년작 ‘스파이의 유산'(2017)은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1963)의 후속작으로, 전작에서 들추지 못한 사건 속 인물들의 사연과 갈등을 반추하는 작품이다. 영원할 것 같던 베를린장벽이 허물리는 세월을 산, 작가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 스마일리의 부하 피터 길럼이 50년 저편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품이고, “그때 난 너무 젊고 너무 순수했어. 너무 순진하고 너무 직급이 낮았어”라는 혼잣말로는 결코 다독여지지 않고, 지난 삶 전부를 부정할 수도 없는 늙은 스파이의 회한을 담은 작품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해빌런드 스미스(Haviland Smith, 1929.8.25~2024.6.20)가 유럽 현장요원으로 활동한 시기도 르카레의 스파이들의 시간과 겹쳐 있었다. 그는 58년 현 체코 프라하에 처음 배치돼 63년까지 베를린지부에서 일했다. 르카레가 국내 방첩기관(MI5)을 거쳐 외무부 소속 MI6 요원으로 서독 수도 본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도 60년이었다. 아마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을지 모른다.
‘스파이의 유산’에는, 스미스라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대목이 있다. 설정상 50년대 중반쯤 활동을 시작했을 길럼이 수습 시절 여러 가지 스파이 기술들, “예를 들어(…)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스쳐 지나가며 은밀히 물건을 건네는 기술 같은 것”을 배웠다는 대목. 그들 용어로 ‘브러시 패스(brush pass, 솔질하기)’라 불리는 저 기술이 현장에서 처음 쓰인 건 65년이었고, 그걸 창안한 이가 스미스였기 때문이다.
첩보 활동 중 가장 위험하고 취약한 단계 중 하나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당시 요원들은 ‘자산(정보원)’에게 지령을 내리거나 비밀 문건 등을 전달받을 때 주로 ‘데드 드롭(dead drop)’이란 방법을 썼다. 돌담 틈이나 우편함 등 미리 약속한 장소와 시간에 메시지나 서류를 몰래 두고 회수하는 수법. 우편물로 보내거나 은밀한 시간대에 직접 만나 주고받는 것보다는 안전했다. 하지만 대개 접선 장소는 정보원의 안전을 위해 그들의 활동 근거지와 가까운 곳이어서 비밀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험지(denied-area)’였다. 끈질긴 미행 때문에 작전이 취소되기 일쑤였고, 동선 노출로 장소가 발각돼 네트워크 전체가 붕괴되는 예도 있었다. 정보원이 발각되면 정보도 당연히 무용지물이 되고, 역정보로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스미스가 현장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게 그거였다. 데드 드롭 작전 중 미행을 감지하고 ‘꼬리’를 자르느라 걸음을 재촉했다가 증파된 감시팀에 포위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창문 만들기(creating a window)’ 혹은 ‘틈(gap) 만들기’라 불리는 기술도, 뉴욕타임스 기자 겸 논픽션 작가 벤저민 와이저(Benjamin Weiser)에 따르면 스미스의 작품이었다. 수개월간 스스로도 따분할 만큼 규칙적인 스케줄과 동선을 유지함으로써 감시팀이 긴장을 늦추게 해서 결정적인 몇 초의 빈틈을 만드는 수법. 와이저는 2004년 책 ‘A Secret Life’에서 길모퉁이를 도는 직후가 주로 그가 활용한 '결정적 순간'이라고 소개했다. “스미스는 평소 네 명의 체코 비밀경찰이, 두 명은 뒤에서 두 명은 길 건너편에서 자신을 미행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길을 걷다가 우회전하는 순간 몇 초 동안 미행자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만 뜸을 들여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어, 성공률과 별개로 생산성은 그리 좋진 않았을지 모른다.
영화 ‘아르고(Argo)'의 모티브가 된 CIA 변장술의 대가 토미 멘데즈(Tony Mendez)와 CIA 변장팀장을 지낸 그의 아내 조나(Jona)는 2019년 공저 ‘Moscow Rules’에서 "스미스는 화려한 스파이 장비나 007 스타일의 스턴트가 아니라 스스로 철저히 따분해짐으로써 비밀경찰을 무력화하곤 했다"고 소개했다.
냉전기 스파이들의 수도는 단연 베를린이었고, 논픽션 작가 브라이언트 얼슈타트(Bryant Urstadt)에 따르면 “현대 첩보 기술 대부분”이 탄생한 곳도 거기였다.
하지만 ‘브러시 패스’는, 따지자면 베를린이 아니라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 만들어졌다. 유럽 근무를 마치고 63년 버지니아 랭리의 CIA 본부로 잠시 복귀해 프라하 지부장 대리로 일하던 스미스는 최대한 은밀하고 비밀스러워야 한다는 스파이 세계의 활동 원칙과 통념을 뒤엎고 백주 대낮에 다중이 붐비는 공공장소에서 벌이는 저 대담한 수법을 고안했다. 하지만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본부의 공식 승인을 얻어야 했다.
1965년 어느 날 워싱턴DC 메이플라워 호텔 로비에 당시 CIA 계획담당 부국장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를 대리한 토머스 캐러메신스(Thomas Karamessines)와 동유럽 지부 총책임자 브론슨 트위디(Bronson Tweedy) 등이 손님을 가장해 띄엄띄엄 앉았다. 경력 10년 차 요원 스미스가 1년 넘게 건의해온 ‘브러시 패스’의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한 시연무대였다. 요원 역을 맡은 스미스가 호텔 로비에서, 간부들의 집요한 감시 속에 미지의 정보원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게 과제였다. 하필 그날 비가 왔던지 비옷의 물기를 털며 로비에 들어선 스미스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뭔가를 감지한 듯 이내 로비를 벗어났다. 캐러메신스가 “도대체 언제 하느냐”며 짜증을 내자 트위디가 “톰, 이미 끝났어”라고 대답했다고, 와이저는 저 책에 썼다. 마술사들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관중의 시선을 엉뚱한 데로 이끌듯, 스미스가 비옷을 흔들던 순간 이미 ‘일’이 끝난 거였다. ‘브러시 패스’ 기술은 그렇게 본부 승인하에 동유럽과 전 세계 지부 요원에게 전수됐고, 불후의 스파이 수법 중 하나로 지금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멘데즈 부부는 “스미스가 한 일은 본질적으로 험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방식의 문제일 뿐이란 사실을 증명한 거였다”고, 2019년 책에 썼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메이플라워 호텔은 1933년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776호실에 투숙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저 강렬한 문구가 담긴 취임 연설문을 썼던 곳이었다.
해빌런드 스미스는 뉴욕 맨해튼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사진 작가 아버지와 요리책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모가 이혼한 만 3세 때부터 뉴저지주 리지우드 외가에서 성장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여러 기숙학교와 명문 사립 ‘필립스엑시터아카데미’를 거쳐 53년 아이비리그 다트머스대(영문학, 러시아어 전공)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하키팀과 라크로스팀 주전으로도 활약했다. 훗날 그는 “나는 이빨을 온전히 지닌 채 대학을 졸업한 첫 골키퍼였다”고 말했다. 하키 골키퍼의 얼굴 보호장구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51년 육군에 입대해 러시아어 전공 덕에 보안국에서 근무하며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육군언어학교에서 러시아를 심화 학습했고, 제대-졸업 후 런던대에서 러시아지역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런던 시절 현지 대사관 직원이던 당시 아내(Matha Allen)와 동행한 한 파티에서 CIA 지부 요원과 인연을 맺어 자잘한 일들을 돕다가 56년 정식 요원이 됐다.
독일 사학자 볼프강 크리거가 쓴 ‘비밀정보기관의 역사'란 책에는 정보-첩보 업무가 예로부터 “진정한 신사들”의 일이 된 역사적 배경이 실려 있다. 그들은 언어 능력과 문화적 소양 등 지적-정서적-육체적 역량과 자질에다 필연적으로 감당하게 되는 가치의 상충, 즉 보편 윤리와 애국심, 진실과 조직의 이해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주저앉지 않을 만큼 굳건해야 하고 그 확신을 수시로 검증받아야 했다. 이념-이상이든, 물질적 보상이든 동기 역시 뚜렷해야 했다. 특히 50, 60년대 영국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 엘리트들이 대거 정보기관에 몰려든 데는 2차대전 선배 세대에 대한 부채감과 스탈린 전체주의에 대한 대결의식,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열정이 겹쳐 있었다. 옥스퍼드대에서 유럽어학을 전공한 르카레가 그랬고, 스미스가 러시아어를 전공한 것도 그래서였다. CIA 입사 전부터 그는 무역박람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국 트랙터를 팔러 온 구소련-동구 출신 상사맨들과 일삼아 대화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다.
스미스는 프라하 지부(58~60)를 거쳐 서베를린(60~63)에서 베를린장벽(61)이 세워지던 현장을 지켜봤고, 만 3년 본부 근무(63~66)를 마친 뒤 중동의 정보 허브로 꼽히는 레바논 베이루트 지부(66~69)에서 67년 제3차중동전쟁을 치렀다. 이란 테헤란 지부(69~71)에서 현장 생활을 마감하고 랭리로 복귀, 80년 은퇴할 때까지 대테러담당 국장과 훗날 레이건 정부의 국방장관을 지낸 당시 CIA 부국장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보좌관을 지냈다. 현장 시절 그의 주 업무는 유무선 도감청과 정보원 포섭-관리였고, 랭리에서는 요원 교육과 지부 원격 지휘를 맡았다. 대테러팀 시절 그의 상대는 이탈리아 ‘붉은 여단’, 독일 ‘바더 마인호프(Baader-Meinhof)’와 ‘검은 구월단’, 아일랜드 준군사조직 IRA, 일본 적군파 등이었다. 그가 가담했거나 지휘한 작전과 구체적인 활약상은 당연히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는 CIA가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뛰어난 활약과 업적으로 기관의 위상을 높인 이들”에게 수여하는 ‘정보공로훈장(Intelligence Medal of Merit)’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스파이의 유산’의 길럼이 은퇴 후 프랑스 브르타뉴의 외딴 농장에서 “밤이면(…) 소 울음소리와 암탉들이 다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낸 것처럼, 스미스도 은퇴 후 CIA 동료였던 돌로레스(Dolores Smith)와 재혼한 뒤 버몬트주 브룩필드(Brookfield)의 너른 땅(25에이커)에서 사슴농장을 운영하며 인근 식당과 식료품점 등에 고기를 납품했다. 89년 가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TV로 보며 울었다는 곳도 그 농장이었다. 99년 그는 사슴뿔에 들이받혀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뒤 아내의 만류로 농장을 팔고 벌링턴(Berlington) 인근 작은 콘도로 이사했다. 그에겐 전처 소생의 3남과 돌로레스와 낳은 딸이 있었다.
은퇴 후 그는 워싱턴포스트 등 전국지와 지역 매체에 칼럼을 썼고, 특히 중동 문제와 CIA 관련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정부의 정보 예산 및 인력 감축을 못마땅해 했고, 9·11 직후 CIA가 맞은 몰매도 행정부 주장처럼 CIA 탓만은 아니라고 옹호했다. 2007년 영국 MI5가 여객기 테러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것에 주목하며 대테러활동에 관한 한 지역 정보기관과의 정보 협력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며 CIA 국내 지부 설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6일전쟁 당시 그는 이스라엘 공군과 해군이 시나이반도 국제수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첩보선 USS 리버티(Liberty)호를 공격, 승무원 34명(171명 부상)을 숨지게 한 사건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선박으로 오인했다고 해명했지만, 2007년 공개된 미 국무부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폭격기 교신 등을 감청, 이스라엘이 미국 첩보선임을 알면서 고의로 저지른 짓이란 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중동을 견제하기 위한 이스라엘과의 동맹이 중요해 유가족과 국민에게 진실을 감춘 거였다. 현장 고참 정보원이던 스미스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 침묵했을지 모른다. 2007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교신 녹취록을 보진 못했지만 같은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었고, 모든 관련 자료가 극비로 묻힌(deep-sixed) 것은 알고 있었다”고만 말했다.
다행히 그의 활동무대는 60, 70년대 ‘더러운 전쟁’으로 CIA가 악명을 떨친 중남미가 아니었고, 대테러전쟁에서도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은퇴했다. 하지만 ‘리버티호 사건’에서처럼, 르카레의 피터 길럼처럼, 이상이 아닌 애국과 조직-자신의 안위를 택해야 하는 경험은 더러 했을지 모른다.
이라크 전쟁(2003~2011)을 앞두고 CIA와 부시 정부의 갈등이 표면화한 적이 있었다. 부시의 매파들이 알카에다와의 연계 의혹과 대량 살상무기 등 불확실한 정보로 이라크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는 게 CIA 입장이었다. 부시는 2004년 9월 하원 정보위원장이던 측근 정치인 포터 고스(Porter Goss)를 CIA 국장에 임명, 관리요원들을 대거 숙청하고 행정부 충성파들로 교체했다. 이라크 관련 기밀정보 유출에 대한 문책이란 게 명분이었지만, 당시 뉴욕타임스는 전쟁이 잘못될 경우 백악관의 선택이 의도된 오류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한 조치라 의심했다.
스미스의 2005년 1월 3일 자 워싱턴포스트 칼럼의 어조는 드물게 격렬했다. 그는 “CIA의 법적 책임은 대통령의 입맛에 맞든 안 맞든 오직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만 “현 행정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 썼다. “포터 고스와 그의 군대는 테러에 맞서고 있는 우리의 최고 방어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테러라는 진짜 문제에 대처해야 하는 이 절박하고도 불행한 순간에 CIA를 숙청하는 것은 제 코를 베어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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