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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없는 시대에 아버지·아들이 갓을 만드는 마음...덕수궁서 만나는 'K헤리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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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없는 시대에 아버지·아들이 갓을 만드는 마음...덕수궁서 만나는 'K헤리티지'

입력
2024.09.05 15:26
수정
2024.09.05 19: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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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서 '시간을 잇는 손길' 전시 개막
'전승 취약 무형유산' 150점 공개
노동집약 유산의 예술적 경지 선보여
창덕궁 낙선재서도 K공예품 80점 전시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리는 '시간을 잇는 손길' 전시에 전승취약종목 '전통기술' 20개 전승자 46명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리는 '시간을 잇는 손길' 전시에 전승취약종목 '전통기술' 20개 전승자 46명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선비는 비가 오면 갓부터 숨긴다"는 옛말이 있다.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성이 외출할 때 쓰는 관모(벼슬아치가 쓰던 모자)의 일종. 옷은 닳아 해진 것을 입어도 계급의 상징인 갓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가장 좋은 것을 쓰고 소중하게 관리하려 했다는 뜻이다. 의복 정제를 중시한 조선의 선비들에게 갓은 품격을 높여 주는 최고의 패션 아이템이었다.

갓 제작 과정은 복잡하다. 말총으로 상단의 모자를 만드는 '총모자일', 가느다란 대나무 실인 세죽사로 갓의 챙을 만드는 '양태일', 모자와 챙을 맞추고 옻칠을 해 완성하는 '입자일' 등 세 단계 공정을 거친다. 갓 하나를 만드는 데 한 달에서 1년이 걸린다. 갓마다 제작기법이 다르고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 하는 까닭이다. 갓은 쓸모를 잃었지만, 묵직한 멋을 지닌 전통 갓은 들여다볼수록 울림이 크다. 손기술이 사라진 공산품의 시대에 인간의 손이 만드는 온기와 기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사라지는 전통 갓을 잇는 사람들

서울 중구 세종대로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시간을 잇는 손길' 전시에서 관람객이 국가무형유산 '갓일' 보유자 정춘모씨의 통영진사립을 보고 있다. 뉴스1

서울 중구 세종대로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시간을 잇는 손길' 전시에서 관람객이 국가무형유산 '갓일' 보유자 정춘모씨의 통영진사립을 보고 있다. 뉴스1

"누군가는 갓일(갓 만드는 일)을 이어가야 한다." 10대에 갓 제작 기술을 배운 이후 묵묵히 명맥을 이어온 국가무형유산 '갓일' 보유자 정춘모(84)씨는 이 같은 소명을 평생 지켰다. 갓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치는 통영갓의 유일한 전수자인 정씨는 "갓은 기능을 넘어 고매한 선비 정신이 깃든 물건"이라며 "품격이란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쌓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긴 시간 매달린 갓의 계승은 이제 아들이 이어가고 있다. 아들은 그의 유일한 제자다.

정씨 부자의 소명의식은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국가무형유산 지정 6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시 '시간을 잇는 손길'을 연 이유이기도 하다. 이달 22일까지 서울 덕수궁 돈덕전과 덕홍전에서 열리는 전시엔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인간문화재)의 작품 150점이 나왔다. 통영갓 외에도 얇게 편 황동판에 섬세한 문양을 새겨 넣은 장식품, 명주실로 꼬아 폭발하듯 피워낸 매듭 장신구, 종잇장처럼 얇은 쇳뿔판에 형형색색의 그림을 새긴 화각함 등 현존하는 최고의 장인과 제자들이 만든 K공예품을 볼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유산 '윤도장' 보유자 김희수씨의 작품. 국가유산청 제공

국가무형문화유산 '윤도장' 보유자 김희수씨의 작품. 국가유산청 제공


텅 빈 궁궐을 수놓은 한국의 멋

2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 기획전시실에서 '시간을 잇는 손길' 개막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2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 기획전시실에서 '시간을 잇는 손길' 개막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전시 대상이 전승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취약종목들이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은 보유자가 극소수인 전통기술·전통공연예술 분야에서 전승 취약종목을 선정해 지원하는데, 지난해는 25개(전통기술 20개·전통 공연예술 5개) 종목을 지정했다. 이번 전시에는 정춘모(갓일), 노진남(샛골나이), 김기찬(낙죽장), 김영조(낙화장) 등 취약종목에 해당하는 무형유산 보유자 46명이 참여해 작품과 제작도구, 제작 과정 영상을 선보였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취약종목 무형유산을 한꺼번에 조명한 첫 전시"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무형유산의 존재를 알리고 국내에 한두 명 남은 장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최근 재건된 서양식 궁궐 돈덕전에서는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공예 작품 80점이 전시된다. 한옥 전각인 덕홍전에서는 전통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생활공예품 70점을 볼 수 있다. 전시 장소로 궁을 고른 것은 전통공예의 정수인 희귀 무형유산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궁궐 안의 빈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 특별한 전시 구도나 장치 없이도 공간 자체가 작품과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감안했다.

전시품들은 전통 한옥 구조인 'ㄱ'자, 'ㅡ'자형 모양으로 제작한 검은색 목재 테이블에 올려 뒀다. 김주일 전시감독은 "전통공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생활 속에서 없어선 안 될 만큼 중요했지만 산업화로 단절되면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며 "한국 공예품이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 시대에 우리 스스로 공예품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소통했으면 싶었다"고 했다. 전시 제목을 '시간을 잇는 손길'로 정한 이유다.

서울 중구 덕수궁 내 덕홍전에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은 무형유산 작품이 전시돼 있다. 국가유산진흥원 제공

서울 중구 덕수궁 내 덕홍전에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은 무형유산 작품이 전시돼 있다. 국가유산진흥원 제공


사람에서 사람으로...오늘의 유산

국가무형문화유산 '두석장' 보유자 김극천씨의 나비경첩 이층 장농. 국가유산청 제공

국가무형문화유산 '두석장' 보유자 김극천씨의 나비경첩 이층 장농. 국가유산청 제공

전시는 장인이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전통 공예품뿐 아니라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생활 공예품까지 아우른다. 대를 이어 전통 기법을 배우면서도 대중성을 구현하려는 자녀 세대 이수자들의 실험과도 맥이 닿는 지점이다.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두석(豆錫·구리와 주석의 합금을 사용해 만든 금속 장식)을 만드는 두석장 보유자 박문열(74)씨와 두석 기술을 활용한 연꽃 문양의 함을 출품한 두석장 이수자 박병용(46)씨는 부자지간이지만 서로 다른 결을 지닌다. 장식으로 사용된 전통적인 금속 재료를 뜻하는 두석은 색상이 아름다워 장식 기물에 많이 활용됐다. 아버지 박씨는 15세 때 공방에 들어가 기술을 익힌 뒤 전국의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전통 자물쇠를 복원하고 제작하는 일을 이어왔다. 금속 세공업을 하다 수년 전 두석장을 전수하기로 결심한 아들 박씨는 "전통기술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해 그 쓰임을 확대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며 "일상 소품을 계발해 두석의 쓰임을 확장하려고 한다"고 했다.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60)씨도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매듭장은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 만든 매듭과 술을 만드는 장인을 뜻한다. 박씨의 외조부모는 고(故) 정연수·최은순 매듭장, 어머니는 정봉섭(85) 매듭장이다. 전통 매듭 기술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박씨의 작품 '잠자리매듭 유리볼 장식'은 관람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김 감독은 "같은 기술로 각각 제작한 장인과 현대 작가의 공예품을 두루 살펴보면 과거와 현대, 전통과 일상을 잇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시와 함께 볼 만한 전시는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열리는 '낙선재遊(유)_이음의 결'전이다. 궁궐의 정취와 함께 전통문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소반, 자수 병풍, 누비옷, 궁시(화살), 선자(전통부채), 채상(대나무줄기로 만든 공예품) 등 8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낙선재 전시는 8일까지.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씨의 작품 잠자리매듭 유리볼 장식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씨의 작품 잠자리매듭 유리볼 장식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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