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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찾아온 우울증, 이혼하고 싶은 자신이 싫고 이해가 안 가요

입력
2024.09.08 13: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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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결혼을 한 30대 직장인입니다. 유럽 태생의 남편과 남매를 낳았고, 지금은 셋째를 임신 중입니다. 앞선 아이들 임신 때도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초기부터 입덧 증상이 악화하는 임신 오조로 정말 괴로웠습니다. 지난달까지 하루에 30번을 토했고, 씻거나 먹기는커녕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됐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살고 싶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병원 아니면 집 밖에 나가지 못했고, 엄마 역할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역겹고 더러운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건 지금도 똑같습니다.

임신 초기를 지나 이제 입덧이 조금 괜찮아지니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뱃속 아이의 초음파를 봐도 잘 크고 있다는 안도는 되지만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감정 이입이 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데도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외국인이라 한식도 못 만들고, 살림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짜증이 나요. 남편은 한결같이 잘해주는데도 '네가 뭘 아냐. 이해하는 척 말라'고 날을 세우기도 합니다. 제가 봐도 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이러는 제가 정말 싫고 뱃속 아이에게도 미안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매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 모두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던 저는 집에만 오면 모든 게 잘못인 문제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모님께 맞기도 했고, 갖다 버리겠다면서 짐을 싸서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엌칼을 들고 서로 죽겠다면서 협박하며 싸우는 모습도 봤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와 자녀가 함께 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차라리 가족이 같이 죽으면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혼나면서 자라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아니었습니다.

최근 결혼기념일을 맞았습니다. 남편과는 임신 전에는 특별히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오래 연애해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죠. 결혼기념일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괴로운 와중에 거울을 보는데 너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남편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이혼을 한 상태로 같이 살면서 그냥 친구처럼 함께 아이들 돌보는 그런 관계로 지내고 싶습니다. 남편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달랩니다. 하지만 하루도 이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 괜찮아진다고 말하는 것조차 듣기 싫어요.

평소엔 무슨 일이든 끝까지 잘 해내려고 하는 편입니다. 독립적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 놓이니 저 자신이 너무 더럽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것도 하기 싫습니다. 기분은 늘 바닥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아이들이 장난치고 애교 부려도 웃는 게 너무 힘들어요. 웃어도 입 근육이 떨리고 눈은 울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제껏 제 자신이 이렇게 싫었던 건 처음이에요.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진아(가명·35·직장인)

임신 오조 증상으로 너무 고생하신 진아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임신 초기가 지나 증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는데도 오히려 더 힘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계시죠.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이혼에 대한 생각과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고통의 굴레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진아씨는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인 학대와 정서적인 학대를 모두 당하셨죠.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표면상 ‘독립적인 성격’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불안정하기 마련입니다. 진아씨도 자신의 성격이 매우 독립적이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걸 싫어한다고 표현하셨지만, 의지했다가 자칫 상처나 배신을 받을까 두려워 타인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어 나가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독립적이라기보다는 반의존적인 것이죠.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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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처럼 끝까지 잘 해내려는 성격 역시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됐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반복적으로 학대를 겪으면 '내 힘으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주변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런 무력감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생기곤 합니다.

임신 오조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증상이 잦아들었다고 하시지만, 임신 오조는 신체·정신적으로 문제가 계속될 경우 극단적으로는 임신 중단이 최후의 치료법일 정도로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진아씨에게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구토 등에 계속 시달리는 일 자체가 과거의 무력감을 다시 느끼게 했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무력감뿐 아니라 하루 수십 번의 오심과 구토 등 신체적으로 굉장한 고통 역시도 과거의 학대 경험으로 연결되곤 합니다. 지금 자신을 혐오하고 역겨워하는 생각 자체가 트라우마로 인한 연상입니다. 가정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고 학대를 받으면 자신 역시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죠. 진아씨는 심한 임신 오조를 계기로 무력감과 신체적인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런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고 계신 상황으로 보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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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공격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경험한 학대나 고통이 마음에서 해결이 안 된 상황에서 분명히 남편은 내 편이고 나를 학대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투사'를 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 공감받지 못했던 감정들을 안전한 내 편인 남편한테 투사하는 것이죠. 오히려 남편이 내 편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행동을 했을 수 있습니다. 또 트라우마 상황에서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자기편인 사람의 행동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역겨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아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아씨의 이혼에 대한 생각도 부모님으로 인해 결혼과 가족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상황에서 '긴밀한 관계'로 인한 부담을 덜려는 무의식적 소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에서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기에 어느 정도 정서적인 거리를 두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겁니다. 이혼을 통해 거리를 조절하고 배우자라는 관계의 책임이나 기대를 내려놓으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죠.

성장 이후 통제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이런 트라우마가 깊숙이 감춰졌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라우마를 해결하려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많은 분이 이 과정이 힘들다 보니 외면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오기 마련입니다. 임신으로 임신 오조를 강하게 겪게 된 진아씨도 그렇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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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씨에게는 우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권합니다.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전문가를 만나서 어렵더라도 지금의 상태 및 과거의 감정 경험을 전달하고 수용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묵혀 둔 과거의 감정과 경험을 힘들지만 재정립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역시 전문가 상담 과정에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만, 감정 일기를 통해 자기 감정을 늘 기록하고 긴밀한 내면 상태를 잘 이해하려 노력해 보기를 바랍니다. 혼자의 노력뿐 아니라 신뢰하는 사람, 진아씨의 경우에는 남편과의 소통을 통해서 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일도 필요합니다. 지금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만큼 내키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은 말씀드렸다시피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인 만큼 이런 점을 잘 활용해서 소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아니더라도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털어놓고 공감을 받는 일은 중요합니다.

진아씨는 지금 임신한 상태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계십니다. 육아하면서 임신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특히 육아는 자연스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나는 순간에, 과거에 경험했던 폭력적인 경험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당신의 상황이 더욱 견디기 힘들고 괴로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새로 만든 가족과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굴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호랑이가 무섭기 마련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인 만큼 이 기회를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로 삼아나가는 진아씨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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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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