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어떤 사과라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입력
2024.09.13 00:17
26면
0 0

인간의 가장 섬세한 상호작용
사회 지도층의 어정쩡한 사과
방어기제에 숨는 비겁한 처사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①게임 중 당신의 돈을 가져가고 무례한 댓글을 보낸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습니다, 죄송합니다.

②당신과 게임을 한 OOO입니다. 게임 중 당신의 돈을 가져가고 무례한 댓글을 보낸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사과문의 다른 점은 사과하는 사람이 이름을 밝혔는지 아닌지다. 어느 쪽이 더 진정성 있다고 느껴지는지 물으면 사람들 답변은 대부분 같을 것이다.

③제가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당신의 재미를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④제가 행동한 방식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돈을 뜯어낸 것과 비꼬는 말을 한 것을 후회합니다. 더 사려 깊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③은 ‘조건부’ 사과인 데다 상대방이 받은 피해의 범위를 ‘재미’로 한정했다. 잘못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반면 ④는 잘못을 구체적으로 짚으며 후회하는 심정까지 표현했다. 이 네 가지는 최근 영국 BBC가 전문가들과 함께 설계한 게임에서 누군지 모르는 상대에게 모욕을 당하고 돈을 잃기까지 한 참가자들에게 무작위로 보낸 사과문이다.

사과를 받아들일 의향을 물었더니 ④를 받은 참가자들이 제일 높았고, ①과 ③이 나란히 가장 낮았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이 돈을 따는 데 유리하게 만든 마지막 라운드 게임을 진행했다. ‘보복’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 결과 사과문 ③, ①, ②를 받은 참가자의 각각 30%, 10%, 9%가 상대의 돈을 가져가는 식으로 보복했는데, ④를 받은 참가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학연구 목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실험이 아니라서 진지하게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어떤 사과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테스트다.

사과는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장 섬세한 상호작용 중 하나다. 잘못을 부인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자기합리화를 하는 게 사과보다 진화적으로 더 발달한 행동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잘못의 불가피성을 끼워 맞추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보다 상대가 누그러질 만큼 용서를 구하는 게 더 성숙하고 용기 있는 행동임을 알기 때문이다.

반년 넘게 본업에 손 놓은 집단행동에도 묵묵히 병원을 지킨 동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공격한, 일부 의사들의 도 넘은 행태에 대해 대한의사협회가 “심각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다. 유감 표명은 사과가 아니다. 서민들은 응급실 뺑뺑이 돌다 목숨을 잃는데 “부탁한 환자 수술 중”이라는 문자메시지에 “감사”라고 답하다 들킨 의사 출신 국회의원은 부탁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뻔히 보이는 해명은 거짓 사과보다도 못하다.

규정 위반 군기훈련으로 훈련병을 숨지게 한 혐의를 받은 중대장은 구속 기로에 놓이자 그제야 유족에 사과 ‘문자’를 보냈다. 그 사과는 용서 아닌 분노를 불렀다. 대통령은 배우자가 수백만 원짜리 가방을 받은 걸 뒤늦게 “현명하지 못한 처신” 정도로 정의하고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법의 판단에 앞서 잘못의 무게를 정해버린, 팔이 안으로 굽은 사과였다. 정작 가방 받은 당사자는 사과는커녕 보란 듯 공개 행보에 나섰다.

사회 지도층의 사과가 국민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는 건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방어기제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사과하면 자리를 잃거나 책임을 진다는 기억이 학습돼 있어 직급이나 권위가 높을수록 사과를 피하게 되고, 어정쩡한 사과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과문 ④는 챗GPT가 썼다. 어떤 사과가 마음을 움직이는지, 인공지능도 아는 세상이다.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