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이창호에 무승부 이어진 대국서 승
신 9단과 박정환, 변상일, 이지현 9단 압축
예선전서 감지됐던 신진 세력, ‘찻잔 속 미풍’
4강전 예정된 신진서 vs 변상일 ‘빅매치’ 이목
역시 상위 랭커들의 높은 벽은 견고했다. 예선전부터 보여줬던 신진 세력들의 무서운 기세가 베테랑들의 노련한 경기운영 앞에선 ‘찻잔 속 미풍’으로 수그러들면서다. 국내 최고 권위의 프로바둑 기전인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우승상금 7,000만 원) 승자조 4강 진입 과정에서 감지된 적자생존의 기류다. 아울러 이례적인 무승부(3패빅) 대국을 포함한 전,현직 명인들의 빅매치도 이번 대회에선 또 다른 볼거리로 남겨졌다.
11일 경기 성남시 판교 K바둑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47기 명인전’ 마지막 8강전에서 디펜딩챔피언인 신진서(24·9월 기준 국내 랭킹 1위) 9단이 역대 최다 명인(13회) 타이틀 보유자인 이창호(49·81위) 9단에게 승리, 마지막 4강행 티켓을 따냈다. 이날 4시간 30분가량 진행된 두 선수의 첫 대국은 3패빅으로 마무리된 가운데 이어진 두 번째 경기에서 대국 초반 우하귀에서 나온 이 9단의 결정적인 실수로 최종 승리는 결국 신 9단에게 돌아갔다. 3패빅은 프로 바둑 기사들 사이에서조차 좀처럼 나오기 힘든 형세로, 1,000대국 중 단 한 번의 경험도 힘들다는 게 바둑계 정설이다.
이날 경기 결과에 따라 이번 명인전 4강은 신 9단과 박정환(31·2위) 9단, 변상일(27·4위) 9단, 이지현(32·14위) 9단으로 좁혀졌다. 박 9단은 앞서 국내 여자 바둑 랭킹 1위인 최정(28·25위) 9단에게 초반 기선 제압부터 성공, 175수 만에 판을 정리했다. 변 9단은 요즘 국내 여자 바둑계의 ‘뜨거운 감자’인 김은지(17·27위) 9단과 무려 5시간의 치열한 혈투 끝에 신승했다. 이 9단도 수읽기에서 착각한 문민종(21·15위) 8단의 좌중앙 대마 사냥에 성공, 105수 만에 단명국으로 일찌감치 승부를 마무리했다.
사실, 이번 명인전은 다크호스들의 잇따른 본선행 진출로 이변도 점쳐졌다. 특히 대회 초반부터 국내 여자 바둑계 투톱인 최 9단과 김 9단에 이어 K바둑 차세대 주자로 꼽힌 문 8단의 이번 명인전 약진세는 신선한 돌풍으로 주목됐다. 하지만 기대됐던 신진 세력들의 이런 명인전 반란 조짐은 4강 문턱에서 제압된 모양새다. 물론, ‘패자부활전’ 형태를 도입한 명인전 대국 특성상 패배한 기사들에게도 추가 기회가 주어지지만 가시밭길이다. 명인전은 치열한 예선을 통해 뽑힌 12명의 본선 진출자와 전기 우승자 및 준우승자, 2명의 후원사 시드배정 등으로 압축된 총 16명의 맞대결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패한 선수들은 ‘패자조’로 후진, 그들만의 별도 리그를 통해 승자조 결승 진출자와 명인전 최종 우승컵을 놓고 마지막 진검승부(3번기, 3판2선승제)에 나선다.
불꽃 튀는 경쟁 속에 완성된 만큼, 이번 명인전 4강전엔 벌써부터 스포트라이트가 쏠린다. 당장 신 9단과 변 9단의 빅매치가 예고된 상태다. 직전 명인전 결승전에서 만났던 두 선수의 맞대결이 연거푸 성사되면서다. 중요한 길목마다 신 9단에게 매번 발목을 잡힌 변 9단은 이번 명인전에선 반드시 설욕에 나서야 할 판이다. 변 9단은 지난해 12월 벌어진 ‘제46기 명인전’ 결승에서 신 9단에게 패배, 준우승에 그친 데 이어 올해 2월엔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8회 LG배 기왕전’(우승상금 3억 원) 결승(3번기)에서 신 9단에게 또다시 허무하게 우승컵을 내줬다. 변 9단에겐 신 9단과 통산 8승37패로 절대 열세인 상대 전적 개선 또한 시급한 과제다.
이에 맞설 명인전 ‘디펜딩챔피언’인 신 9단 또한 최근 상승세다. 신 9단은 올해 상반기에 3개(LG배·춘란배·응씨배)의 세계 메이저 본선 탈락에 이어 ‘제10회 국수산맥 국제바둑대회’(우승상금 1억 원) 결승에서도 대만의 무명인 라이쥔푸(22) 8단에게 패하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지난달 역시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회 취저우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우승상금 180만 위안, 약 3억4,000만 원) 우승에 이어 국내 기전인 ‘제5기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우승상금 7,000만 원) 타이틀도 거머쥐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명인 타이틀에 대한 신 9단의 애착도 상당하다. 신 9단은 평소 “전통과 역사를 가진 ‘명인전’만큼은 꼭 지켜내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박 9단과 이 9단의 또 다른 명인전 4강전도 관심사다. 일단, 객관적인 전력에선 박 9단의 우세가 점쳐진다. 박 9단은 이미 5개의 세계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포함해 국내·외 각종 기전에서만 총 34개의 우승컵을 보유한 초일류 기사다. 신 9단의 득세 직전까지 국내에서 59개월 연속 반상(盤上) 권력을 누려왔던 인물이 박 9단이다. 이에 반해 이 9단은 다수의 국내·외 각종 기전에서 본선 진출과 더불어 꾸준한 성적을 이어온 ‘소리 없이 강한 기사’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열렸던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에서 한국팀원으로 출전한 이 9단은 단체전 금메달 획득에 힘을 보탰다. 군 입대 직전인 지난 2020년엔 ‘입신’들로 명명된 프로 9단 기사들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진 ‘제21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우승상금 5,000만 원)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K바둑 채널에서 이번 명인전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안형준(35) 5단은 “’제47기 명인전’에선 어느 대회보다 양질의 대국과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남은 경기에서도 상당한 접전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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