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일본 정치의 새 바람 '이시마루 현상'
82년생, 시골 출신에 무명 정치인
유튜브·틱톡 등 활용한 선거 운동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일본 사회에도 새로운 정치, ‘이시마루 현상’에 주목
일본 정치에 새 바람을 일으킨 ‘이시마루 현상’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이시마루 현상이란, 지난 7월 실시된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시마루 신지 후보가 일으킨 정치개혁 돌풍을 의미한다. 당시 자민당의 추천을 받은 고이케 유리코 후보가 291만여 표를 얻어 3선에 성공했는데, 50여 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여당의 무난한 승리는 예상된 결과였다. 그보다 일본 사회를 놀라게 한 것은 중앙 정치판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정치 신인이었던 이시마루가 유튜브와 틱톡 등 SNS 플랫폼을 적극 활용한 선거 캠페인으로 무려 165만여 표를 얻어 고이케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다. 정계에 이렇다 할 인맥도 없던 이시마루가 압도적인 지명도의 범야권 유력 후보 렌호(28만 표)를 적지 않은 차이로 제친 것이다.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은 주로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파와 10~20대 젊은 층이었다. 중앙 정치판에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신인 정치인이, 정치적인 관여도가 낮은 층을 움직이며 일본 사회의 고루한 정치에 변화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한 것이다.
인터넷의 반짝 인기가 불러온 일회적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시마루 돌풍을 둘러싼 여러 상황이 퍽 상징적이다. 1982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정치인인 그는 42세로, 다가오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고이즈미 신지로(81년생)와 나이 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고이즈미가 전 총리였던 아버지(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광을 업고 단숨에 정계 요인으로 자리 잡은 것과 달리, 이시마루는 정치 인맥이 거의 없는 시골 출신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부상했다. 일본 정치에서 이처럼 불리한 핸디캡을 극복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시마루의 정치 경력은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에서 4년 동안 시장을 지낸 것이 유일하다. 아키타카타시는 도쿄에서 800㎞ 떨어진, 인구 2만5,000명 남짓의 작은 도시다. 이 도시 출신인 이시마루는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2020년 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직서를 내고 귀향했다. 당시 부시장의 단독 출마, 무투표 당선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무투표 당선을 막기 위해 나라도 출마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 유튜브, 틱톡을 활용, ‘꼰대’ 정치와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주효
작은 도시의 시장직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시마루는 이후 유튜브와 틱톡 같은 동영상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인지도를 쌓아갔다. 특히 노회하고 권위적인 시의원들과 거침없이 말싸움을 벌이거나, 지역 언론에 ‘편파적’, ‘취재가 덜 되었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공개했다. 그의 거침없는 태도는 아키타카타 시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결국 시의회가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소하는 사태까지 불거졌지만, 그의 재임 중 시의 유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 수는 26만 명을 넘어섰다.
그가 “도쿄부터 시작해서 일본을 바꾸겠다”며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자 유튜브 등을 통해 이시마루를 알게 된 지지자들이 우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선거운동을 돕겠다고 나선 자발적인 자원봉사자가 5,000명이 넘었다. 선거 운동의 방식도 내용도 기존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그의 가두연설은 유튜브에서 그를 본 수많은 시민이 모여들어 북적였고, 그는 “맘 놓고 촬영하라”, “원하는 만큼 SNS에서 공유해도 좋다”는 친근한 태도로 호감을 높였다. 레거시 미디어와의 공식 인터뷰에서는 까다로운 태도를 견지했지만 유권자와 직접 소통하는 동영상에서는 우회하지 않는 단도직입적이고 소탈한 말투, 솔직한 사람됨 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런 점이 신문이나 방송 언론보다 인터넷 미디어가 훨씬 더 친근한 젊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요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기성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언행이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정책적 지향은 모호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 재건’, ‘도시 개발’, ‘산업 창출’, ‘교육 강화’ 등 공약은 하나같이 추상적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도 부족하다. 아동 인구 감소 문제 해결책으로 ‘일부다처제’를 언급하는 등 정치 지도자로서 소양을 의심케 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역량과 지도자로서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이시마루 현상이 일본 정치에 진정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지, 아니면 단기적인 인기와 반짝 효과에 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꼰대’ 정치에 반기를 들고 거만한 매스미디어에 일침을 가하는 자수성가형 정치인에 보내는 젊은 세대의 호감은 상당히 높다.
기성 정치권이나 매스미디어는 이런 상황이 썩 달갑지 않은 듯하다. ‘이시마루 쇼크’를 운운하는 등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 세대에게는 “드디어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나왔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젊은 세대의 주요 활동 무대인 인터넷 문화를 이해하는 정치인이 등장하고, 젊은 세대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정치적인 어휘가 공론장에 반영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 일본 정치권에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계기가 될까?
한일 두 나라 모두 젊은 세대의 낮은 정치적 관여도를 우려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젊은이들보다는 정치에 관심을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지난 대선 이후 ‘이대남’(‘20대 남성’의 준말로 보수적인 성향의 젊은 남성을 뜻한다) 혹은 ‘개딸’(‘개혁의 딸’의 준말로 진보적인 성향의 젊은 여성을 뜻한다)과 같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기성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은 이들의 주장을 미숙하고 감정적인 ‘팬덤’으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가 독자적인 관점과 의견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에 비해 일본의 공론장에서는 젊은 세대의 존재감이 실로 미미하다. 젊은 정치인이 있을지언정 그들이 젊은 층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젊은이들이 겪는 문제나 그들의 솔직한 의견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이 젊은 층의 소극성이나 태생적인 정치무관심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오랫동안 젊은 세대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해 온 일본 정치권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향에 있다.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취업난, 비정규직 문제, 젠더 인식,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은 충분히 정치적 의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정치 구조에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 세대는 정치에서 소외되고, 정치권은 점점 더 그들의 목소리에 무관심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져왔다.
이시마루 현상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될까?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은 많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대체불가한 소통수단이 된 인터넷이나 SNS 공간이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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