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신약 '렉라자' 개발 실무진 인터뷰
코로나·전쟁·지진 뚫은 임상경험 자산
경쟁 약 약점 파고든 치밀한 임상설계
빅파마와 협업으로 노하우, 역량 확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튀르키예에 지진이 났을 때, 그 나라들 지도를 거의 매일 들여다봤습니다. 지역별 병원 위치와 의약품이 들어가는 경로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를요. 그 지역이 타격을 받거나 길이 끊길 가능성은 없을지까지 파악했어요."
지난 23일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에서 만난 안태원 임상운영1팀장은 작년과 재작년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회사가 공들여온 폐암 신약 임상시험이 공교롭게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튀르키예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을 함께한 글로벌 제약사 얀센과도 "세 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지역별 환자 모집 현황을 실시간 공유했다"고 안 팀장은 회상했다.
지진에 전쟁까지 겪어내며 빛을 본 신약이 바로 지난달 국산 항암제로는 처음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렉라자'다. 한국일보는 이날 안 팀장을 비롯한 렉라자 개발 실무진 6명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2년여 전만 해도 주변에서 실패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다고 했다. 임상 3상 개시 직후 코로나19 대유행이 닥쳤고, 지진, 전쟁까지 났으니 그럴 만했다. 더구나 후발주자였다. 경쟁 약의 개발 속도가 미국과 유럽에서 한참 앞섰다. 그 지역들을 제외하고 의료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를 찾아 임상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 고생을 하게 됐다. 전쟁 와중에 그래도 러시아에서 67명, 우크라이나에서 23명의 환자가 임상에 참여했다. 김소희 임상통계팀장은 "당초 계획보다 환자 모집 기간이 길어졌다"며 "경쟁약이 보험급여가 안 될 지역이면서 팬데믹 속에서도 임상을 끝낼 규모를 예측해 계획을 짜는 데 고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렉라자가 임상을 시작한 2015년, 치료 대상과 방식이 비슷한 '타그리소'(개발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이미 임상 마무리 단계였다. 다른 후발주자도 난립했다. 김성규 중앙연구소 제품제제팀 수석연구원은 "당시 경쟁 약들의 동물실험 결과를 정밀 분석한 결과 우리 약효가 더 좋다는 걸 확인했고, 따라잡을 수 있을 걸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개발진은 후발주자란 점을 역으로 활용해 선행 임상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특히 뇌에 암세포가 전이된 환자에서 렉라자가 효과적일 것으로 보고, 뇌 영상을 비교분석하도록 임상을 설계한 게 도움이 됐다"고 이승오 임상개발실장은 설명했다.
유한양행의 임상은 환자에게 폐암 약을 렉라자만 투여(단독요법)한 방식이다. 이와 별도로 얀센은 렉라자와 기존 폐암 약 '리브리반트'를 함께 투여(병용요법)하는 임상을 진행했다. FDA는 효과가 좀 더 크게 나타난 병용요법을 허가했지만, 단독요법의 우수성도 입증됐다고 개발진은 밝혔다. 박성남 MSL1팀장은 "뇌 전이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폐암 환자가 렉라자 투여 일주일 만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거동한 사례들이 국제학술지에 보고됐다"고 전했다.
난관을 넘으며 임상을 완주해낸 경험은 토종 제약사의 자산이 됐다. 김성규 연구원은 "글로벌 제약사와 협업하면서 우리 역량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큰 성과"라고 힘주어 말했다. 유한양행은 렉라자의 수익을 다시 연구개발에 투입해 제2, 3의 렉라자 개발을 앞당긴다는 전략이다. 이승오 실장은 "후속 항암제 후보물질 3가지가 순차적으로 임상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신약 후보물질이 상용화에 성공할 확률은 0.02%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큰 수익을 내는 신약은 극소수다. 소순용 마케팅4팀장은 "항암제 전문 영업망도 확보했다"며 "렉라자를 앞세워 올해 전체 매출 2조 원 돌파가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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