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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와의 싸움 완주 앞둔 '봉달이' 이봉주

입력
2024.10.05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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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고교 1학년 때 육상 입문한 '늦깎이' 마라토너
숱한 역경과 고비 헤치고
애틀란타 올림픽 銀·보스턴 마라톤 챔피언 등극
2020년 희소질환 '근육긴장이상증'으로 고통
"꾸준한 재활로 다시 달려요"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 앞 운동장에서 신발끈을 조여 매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 앞 운동장에서 신발끈을 조여 매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매일 한 시간 정도씩 달리기, 등산, 수영, 걷기 운동을 돌아가면서 하고 있어요.”

이봉주(54)가 다시 신발끈을 조여 맸다. 2020년 1월부터 희소질환인 ‘근육긴장이상증’을 앓고 있는 그는 “대형병원과 유명 한의원을 다 찾아가 봤지만 치료와 수술(낭종제거)로는 딱히 질환이 호전되지 않았다”며 “재활로 이겨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스트레칭, 지압 마사지 등을 꾸준히 한 끝에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고 웃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챔피언, 한국 마라톤 최고기록(2시간 7분 20초) 보유자 등 숱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봉달이' 이봉주를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만났다.

늦깎이 육상 입문과 두 번의 전학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본보와 만나 육상 입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본보와 만나 육상 입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이봉주는 남들보다 늦은 고교 1학년 때 육상에 입문했다. 그는 “처음에는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금전적인 뒷받침이 힘들 것 같아서 그나마 돈이 덜 드는 육상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마저도 정식 육상부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다니던 천안농고에는 제대로 된 육상부가 없었다. 특별활동으로 편성된 취미반 수준이었다”고 육상과의 첫 인연을 돌아봤다.

당연히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이봉주는 집에서 학교까지 약 12㎞의 거리를 1시간 30분에 걸쳐 매일 뛰었다. 1년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스스로도 실력이 향상되는 걸 느꼈다. 정식으로 육상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찰나에 마침 예산 삽교고가 ‘수업료 1년 면제’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다시 1학년부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지만, 그는 오로지 육상을 위해 기꺼이 전학을 결심했다.

처음으로 틀이 잡힌 곳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삽교고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가 성적부진을 이유로 육상부를 해체해 이봉주는 또다시 갈 곳을 잃었다. 홍성 광천고(현 한국K-POP 고교)에 세 번째 둥지를 틀면서 숨통이 트였지만, 이번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성적이 필요했다.

이때 이봉주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고교 마지막 대회인 1989년 전국체전 10㎞ 단축마라톤에서 특기생 자격이 주어지는 3위에 가까스로 턱걸이했다. 이봉주는 “경제적인 여건을 생각해 월급을 받으면서 대학도 다닐 수 있는 서울시청(학과 등록은 서울시립대 야간 무역학과)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친구' 황영조를 보며 교차한 기쁨과 우울감

이봉주가 1993년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양손을 치켜들고 기뻐하고 있다. 호놀룰루=AP 연합뉴스

이봉주가 1993년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양손을 치켜들고 기뻐하고 있다. 호놀룰루=AP 연합뉴스

생활이 안정되면서 이봉주는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 제71회 전국체전 마라톤 풀코스 준우승으로 육상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성인무대) 첫 출전이라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그냥 정신 없이 뛰기만 했는데 2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며 웃었다. 이어 “한 번 준우승을 하니까 욕심이 생겼다”며 “마라톤에 대해서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비로소 마라톤에 눈을 뜬 그는 이듬해 전국체전에서 첫 풀코스 우승을 일궈내며 확실한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은 언제나 온탕과 냉탕의 연속이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이봉주는 “선발전 한 달여를 남기고 출전한 도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당시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다”며 “결국 과도한 훈련으로 무릎 부상을 당했고, 선발전을 중도포기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 일로 그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할 만큼 약 6개월간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1994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이봉주(오른쪽)와 황영조가 대회 전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4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이봉주(오른쪽)와 황영조가 대회 전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찌보면 당시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친구이자 라이벌인 황영조였다. 이봉주는 ‘몬주익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을 전지훈련지에서 지켜봤다. 그는 “손기정(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선생님 이후 한국의 첫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었으니 당연히 너무 기뻤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같이 나갔더라면 못지않게 잘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에 우울한 마음도 들었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 느꼈던 양가적인 감정은 결과적으로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는 이듬해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첫 세계무대 정상에 선 뒤 ‘마라톤 명가’ 코오롱마라톤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수확의 영광도 맛봤다. 1위 조시아 투과니(남아공)와 불과 3초 차이라 금메달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는 “스타디움에 들어와서야 3위 선수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역전 은메달을 딴 셈이라 마냥 기뻤다”며 “레이스를 마친 후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 스포츠계에서 올림픽 은·동메달이 갖는 의미도 달라졌다. 기존에는 2·3위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봉주 이후 은·동메달리스트들도 마음껏 기쁨을 표출할 수 있게 됐다.

이봉주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을 획득한 후 태극기를 들고 올림픽 스타디움을 돌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봉주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을 획득한 후 태극기를 들고 올림픽 스타디움을 돌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라톤 인생 최대의 고비 '코오롱 사태'

애틀란타 대회 이후 그는 황영조를 잇는 한국 마라톤계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1998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준우승했고,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앞길에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봉주는 이듬해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불린 사건으로 마라톤 인생 최대 고비를 맞았다. 당시 그와 동료들은 △코칭 스태프 낙하산 인사 △소속 선수 부당 처우 △지나친 사생활 침해 등에 반발해 소속팀을 집단으로 이탈했다. 이후 선수들의 복귀로 사태가 해결되는 듯싶었지만, 양측의 갈등이 끝내 봉합되지 않으면서 결국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팀을 떠났다. 이봉주는 “복합적인 상황이었다”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도 “당시 기사에 나왔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봉주가 소속팀 코오롱마라톤팀에 사표를 전달한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 1999년 10월 20일자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봉주가 소속팀 코오롱마라톤팀에 사표를 전달한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 1999년 10월 20일자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후 그는 함께 팀을 나온 오인환 코치를 비롯해 6, 7명의 동료들과 4~5개월간 무소속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이봉주는 “자비로 먹고 자면서 훈련하다보니 환경이 열악했다”며 “그럼에도 ‘우리가 떳떳하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열심히 땀을 흘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성과도 냈다. 그는 이듬해 2월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최고기록으로 2위에 오르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러나 어렵게 출전한 시드니 대회에서 그는 앞서 달리던 선수들이 우르르 넘어지는 과정에 휩쓸리며 페이스를 잃었다. 그럼에도 이봉주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 그는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며 “시합은 망쳤지만 꼭 끝까지 달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돌아봤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오뚝이 정신'

이봉주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힘겨운 표정으로 결승점에 들어오고 있다. 시드니=사진공동취재단

이봉주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힘겨운 표정으로 결승점에 들어오고 있다. 시드니=사진공동취재단

결과적으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24위)을 냈지만, 이때의 완주는 그의 인생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다. 이봉주는 위기와 시련의 순간이 다가와도 이를 피하지 않고 언제나 묵묵히 정면승부를 펼쳤다. 2001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 대회 정상에 서기까지의 과정도 비슷했다. 그는 “대회를 앞두고 충남 보령에서 훈련을 하던 중에 부친의 부고를 들었다”며 “곧바로 고향 천안으로 가 3일상을 치렀는데, 컨디션이 엉망이 된 상태라 (보스턴 대회) 우승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회를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날아갔고, 결국 1947년 서윤복, 1951년 함기용에 이어 51년 만의 한국인 챔피언이 됐다.

이봉주의 ‘오뚝이 정신’은 현역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그는 37세에 출전한 2007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막판 역전우승을 일궈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28위)했다. 또 ‘은퇴 레이스’였던 2009년 제90회 전국체전에서도 정상에 서는 기염을 토했다. 20년간 마라톤 풀코스에 총 44번 도전해 41번의 완주를 펼친 그는 은퇴 후 체육인 최고의 영예인 체육훈장 청룡장까지 받았다. 이봉주는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대대손손 남는 체육훈장의 의미가 가장 크다”며 웃었다.

이봉주의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 2001년 4월 18일자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봉주의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 소식을 전한 한국일보 2001년 4월 18일자 지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시 뛰는 '봉달이'

이봉주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2020년 한 예능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시작된 복근 경련(근육긴장이상증 증세)으로 한때 운전을 못할 만큼 고생했다. 때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재활에 매진했고, 그 결과 약 1년 전부터 서서히 달리기를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국제국민마라톤대회에서도 시민들과 함께 3.6㎞를 완주했다. 그래서 그가 마라톤 동호인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꾸준함이다. 이봉주는 “요즘 마라톤 인구가 많이 늘었는데, 처음부터 욕심 내지 말고, 매일 조금씩 뛰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 올려야 한다”며 “이렇게 달리다 보면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주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던 중 환하게 웃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이봉주가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던 중 환하게 웃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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