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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장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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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장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입력
2024.10.10 21:56
수정
2024.10.1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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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한강의 문장에 세계 문단 주목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폭력적 내용의 조합이 충격"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로 최초로 10일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은 2016년 5월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가 당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로 최초로 10일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진은 2016년 5월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가 당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력한 시적 산문을 썼다.”

스웨덴 한림원,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한강(53)을 선정하면서 그의 문장의 힘에 주목했다. 진중하되 시적인 그의 문장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 및 비극적 세계관과 만나 국내 문단에서도 호평을 받아왔다. 자주 서늘하고 간절하며 때론 섬뜩한 그의 문장이 도발적 상상력과 만난 작품 ‘채식주의자’가 영어권에서 출간됐을 때, 영국 가디언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과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내용의 조합이 충격적”이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다음은 한강의 작품 속 문장들.

2016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당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당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채식주의자 (2007년, 창비 발행)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50,51p.)

“아무리 길게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72p.)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237p.)

2016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시민이 당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시민이 당시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 소년이 온다 (2014년, 창비 발행)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22, 23p.)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 용서하지 않을 거다. (…)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45p.)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이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 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57, 58p.)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p.)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99p.)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한강 작가 코너에서 시민들이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가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한강 작가 코너에서 시민들이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흰 (2016년, 난다 발행)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p.)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81p.)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117p.)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130p.)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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