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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같이 알아맞힌 그 말, 삶을 저당잡는 미끼였다

입력
2024.10.14 04:00
수정
2024.10.24 22:50
1면
0 0

<방치된 믿음 : 무속 대해부>
소개로 찾은 무당... 개인사 척척 맞춰 신뢰 얻어
명도령 "날 거역 땐 큰일" 부부 가스라이팅 편취
술 시중에 연일 폭행... 굿값 구하려 알바 3, 4개씩
아이들 저주에 분노한 엄마 마침내 '세상 밖으로'

편집자주

하늘과 땅을 잇는 원초적 존재, 무당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범죄의 온상이 될 때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한국일보는 석 달간 전국의 점집과 기도터를 돌아다니며 우리 곁에 있는 무속의 두 얼굴을 조명했다. 전국 어디에나 있지만, 공식적으론 어디에도 없는 무속의 현주소도 파헤쳤다. 문화 코드로 자리잡은 무속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모색했다.

2019년 유재원 형사가 당직실에서 한주은과 이영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2019년 유재원 형사가 당직실에서 한주은과 이영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팀장님, 저 사람들 왜 저러고 있어요?"

"경찰서 세 곳에서 '빠꾸' 먹었대. 우리 경제팀도 못한다고 했나봐."

2019년 2월. 인천 부평경찰서 형사과 유재원 형사는 당직실에 앉아있던 젊은 연인이 유독 신경 쓰였다.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있던 남녀는 무당을 고소한다며 소장에 세 가지 혐의를 적었다. 사기, 성폭행, 공갈.

유 형사는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당직실을 어슬렁댔다. '3개 경찰서에서 빠꾸 먹을 정도면 딱하긴 하네.'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유 형사는 결심한 듯 남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주은님?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남녀가 동시에 유 형사를 올려다봤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다.

명도령에게 2년간 가스라이팅 피해를 입은 한주은씨. 주은씨는 다른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과,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실명 기재 및 사진촬영에 응했다. 하상윤 기자

명도령에게 2년간 가스라이팅 피해를 입은 한주은씨. 주은씨는 다른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과,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실명 기재 및 사진촬영에 응했다. 하상윤 기자


"얘들 내보내! 빨리 내보내라고!"

2017년 늦봄 저녁, 경기 군포 집으로 향하던 택시 안 전화기 너머로 딸(한주은)의 절규가 들려왔다. 어린이대공원 할인티켓 두 장이 들려 있던 김은영(가명)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은영은 손녀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집에서 재우고 싶었을 뿐인데, 딸이 이렇게 거칠게 반응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아이들 보내라고!"

미세한 흐느낌과 함께 딸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은영도 감정이 격해졌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말을 해봐!"

주은은 안양에 있는 밥버거 집에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주은은 자신이 주문한 3,500원짜리 밥버거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엄마에게 소리치면서도 주은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친모인데 아이들이 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신(神)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선녀신은 주은의 가족을 살뜰히 살폈다. 선녀신은 무당이 될 뻔한 첫째 딸을 치유했다. 선녀신은 초등학교 입학 후 동급생에게 성폭행당할 운명의 둘째 딸을 구원했다. 그런 선녀신이 아이들을 살리고 싶으면 양육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보지말 것을 명령했다. 주은이 그것만은 안 된다며 싹싹 빌었지만 신의 뜻은 확고했다.

"아이들 팔다리가 다 찢겨 죽는 꼴 보고 싶어?"

아이들 생각에 속이 뒤집어진 주은은 식어버린 밥버거를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명도령은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

명도령.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명도령.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혹시 무속인 믿어?"

2016년 7월 주은의 피부숍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지민(가명)이 물었다. 숍을 홍보해주는 블로거로 만났지만, 지민의 쾌활한 성격 탓에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주은은 지민에게 고민을 자주 털어놨다. 남편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30분마다 전화하고, 자동차 주행거리 확인하고, 휴대폰까지 뒤지는 남편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별거는 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이혼만큼은 안 된다며 버텼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지민이 주은의 팔을 어루만졌다. "저번에 말한, 부평 명도령 생각해봤어? 한번 가 봐." 주은은 무속을 미신이라 여겼지만, 지민의 설득은 계속됐다. "답 없을 때 그런 데 가보는 거야. 이상한 말 하면 안 믿으면 되잖아."

며칠 뒤 주은은 무너질 것 같은 인천의 한 낡은 빌라 앞에 섰다. '원래 신당이 이런가.' 현관 앞에 설치된 대형 철창 안에선 검은색 도사견이 짖고 있었다. 주은은 커다란 개를 멀찌감치 피해 현관 벨을 눌렀다.

"예약했을까요?" 문이 열리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 175cm, 두터운 풍채, 날카롭게 찢어진 눈, 짙은 눈썹, 모히칸 머리, 양팔에 이레즈미 문신이 잔뜩 새겨진 남자였다. 깡패 같은 첫인상과 달리,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방이 3개 딸린 집 안방에는 어둑한 붉은 조명에 알 수 없는 불상들이 가득했다. 주은은 그제야 신당에 왔다는 게 실감났다. 남자는 신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사람이 명도령이었어?' 무속인과의 첫 독대였다. 명도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여자들 얼굴 만져주는 일 하는구나?"

"네? 맞아요. 저 피부 미용사예요."

"보니까... 아이도 둘 정도 있어 보이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사람들이랑 칼도 휘두르니?"

"아니 어떻게... 제 취미가 검도입니다."

"사주를 보니, 남편이랑 쉽지 않아 보이네."

주은은 20분 만에 사색이 됐다. 이름 석자 말고는 말한 게 없는 주은에게 명도령은 족집게 같은 얘기를 계속했다. "네가 아이를 하나 흘려보냈어. 요즘 일이 잘 안 풀리지? 그 혼령이 붙어있어서 그래." 실제로 둘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 주은은 초기 유산이 의심되는 일을 겪었다.

"혼령을 위로하는 천도재(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의식) 30만 원, 믿을 수 없으면 집에 가."

천도재를 지내고 5개월 뒤, 주은은 완고했던 남편과 협의 이혼했다. 아이들 양육권도 지켜냈다. 피부숍 사업도 안정기에 들었다. 새로운 인연도 찾아왔다. 카센터 정비사로 일하던 이영수(가명)였다. 일사천리로 일이 풀리자, 주은은 명도령이 영험하다고 느꼈다.

부부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그래픽=이지원 기자

"영수야, 명도령님이 잠깐 들어오라고 하네."

영수는 동갑내기 주은을 사랑했다. 주은이 카센터에서 일할 때부터 눈여겨봤다. 주은은 피부숍을 운영하며 두 딸을 키우면서도, 짬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영수는 주은의 전 남편보다는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은은 명도령에 대해 도움을 많이 준 '오라버니'라고 영수에게 소개했다. 그런 명도령이 최근 주은의 아이들 눈에서 피가 쏟아지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은은 계속 불안했다. 영수는 교회에 다녔지만, 무속에 대해 편견은 없었다. "그래, 만나보자."

우락부락한 모습의 명도령은 영수에게 악수를 청한 뒤 본론을 꺼냈다. "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갈 것 같아." 주은의 큰딸이 '신가물(신의 제자가 될 소양과 운명)'이 있어, 무당이 되는 걸 막으려면 누름굿(기를 누르는 굿)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명도령이 영수에게 말했다. "아우, 사랑하는 주은이를 위해 얼마 쓸 수 있어?" 주은의 눈빛을 확인한 영수는 1,000만 원은 있다고 했다. 명도령은 호탕하게 웃어댔다. "남자네 남자야! 300만 원만 내시게. 나머진 내가 할 테니."

영수는 3일 뒤 주은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누름굿 과정에서 둘째 아이 백호살(백호가 물고 가서 피를 흘리며 죽는 살)까지 풀어야 해 541만 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살풀이(흉살을 피하는 의식)를 하지 않으면 학교 입학 후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 영수는 주은에게 돈을 보냈다. 그렇게 영수의 목돈 1,000만 원이 사라졌다.

명도령은 영수를 신당으로 불러 밥을 먹자고 했다. 그는 "누름굿이 잘 끝났다. 남자답다"고 치켜세웠다. 대화를 하다보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주은도 그렇게 말해왔다. 그날 영수는 명도령이 무당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천 강화도 굿당 아래서 신의 기운을 받으며 자랐어. 벼락치기로 성균관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한의사 꿈을 꾸게 돼 원광대 한의학과로 편입했지. 이후 중국 유학길을 나섰다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건달 일을 했어. 범서방파 행동대장으로서, 김태촌이라는 보스를 모셨어. 그러다 신병이 점점 심해져 신내림 받고 무당의 길을 걷게 됐단다."

영수는 이후에도 똑같은 얘기를 수십 번 들은 터라 허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은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아 기뻤다.

주은도 영수를 사랑했지만, 명도령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영수가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해서 잘사는 팔자네." 그 뒤의 말은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너가 죽어야 할 수도 있어." 초조해하는 주은에게 명도령이 말했다. "영수의 조상들이 화가 난 거 같거든? 조상 합의굿을 해야겠어."

주은은 돈이 없었다. 이미 누름굿, 사업굿에 돈을 다 쓴 터였다. 주은이 주저하자 명도령은 무서운 말을 늘어놓았다. "현금서비스 있잖아. 너를 위해 애써준 영수에게 예의가 아니잖아!" 주은은 결국 이리 뛰고 저리 뛰며 300만 원을 마련했다. 명도령은 이 일을 영수에겐 비밀로 하자고 했다.

영수와의 궁합 문제로 명도령은 주은을 불러 자주 술을 마셨다. 그 자리서 명도령은 주은을 혼냈다. "선녀님이 머리 묶으라 했는데 풀어? 실수하네." "회식으로 돼지고기를 먹어? 선녀님이 화나셨겠어." 그때마다 명도령은 주은에게 벌을 줬다. '벽 보고 서' '무릎 꿇어' '밖으로 나가' 거역할 수 없었다. 명도령이 아니었다면 이혼, 영수, 가족, 사업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을 테니까.

명도령에게 맞았지만, 그래도 따라야 했다

2018년 명도령이 인천의 한 노래방에서 이영수를 폭행하고 있다. 한주은씨 제공

2018년 명도령이 인천의 한 노래방에서 이영수를 폭행하고 있다. 한주은씨 제공

2017년 3월 주은과 영수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그런데 명도령은 아이를 지우라고 했다. 범죄자가 될 팔자라고 했다. 영수는 잘 키워보고 싶다고 했지만, 명도령의 뜻은 완강했다. 명도령의 말은 곧 신의 말이었다. 술자리서 명도령은 3시간 동안 영수에게 맥주잔에 가득 담긴 소주를 먹이며 낙태를 강요했다. 주은에게는 발언권조차 없었다.

"우리 선녀신께서 굿도 해주셨는데 애를 낳겠다고? 미쳤어?"

영수는 흔들렸다. 범죄자가 될 팔자라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부부는 명도령이 소개해준 병원에서 아이를 지웠다.

명도령은 낙태 이후 신들의 분노가 잦아졌다고 했다. 태아가 원한이 깊어 굿을 해야 했고, 자손을 해친 죄로 주은과 영수의 조상님들이 노해 천도재와 부정풀이를 해야 했다. 월직차사(저승길로 인도하는 사자)께서도 아이를 무책임하게 버린 영수에게 분노했다고 했다. 일주일에 3, 4번 진행되는 굿 비용은 500만 원이 넘었고, 부부는 명도령에게 건넬 돈을 벌려고 각각 서너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2017년 여름, 주은과 영수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개인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휴대폰 비용을 내지 못해 지하철 와이파이를 찾아다녀야 했고, 도로에서 차가 멈추자 기름값이 없어 2시간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는 지인에게 빌린 돈과 밤낮으로 일해 번 돈을 명도령에게 꼬박꼬박 바쳤다. 명도령은 그렇게 2년간 2억 원이 넘는 돈을 뜯어갔다.

돈으로는 부족했을까. 2017년 겨울부터 명도령은 거의 매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부부를 때렸다. 신당, 음식점, 노래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굿 비용이 밀렸다" 등 갖가지 명목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목을 졸랐다. 주은에게는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다" "선녀신이 시킨다"며 수차례 잠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명도령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명도령에게 2년간 가스라이팅 피해를 당한 한주은씨. 주은씨는 다른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과,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실명 기재 및 사진촬영에 응했다. 하상윤 기자

명도령에게 2년간 가스라이팅 피해를 당한 한주은씨. 주은씨는 다른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과,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실명 기재 및 사진촬영에 응했다. 하상윤 기자

"저희도 알아요. 바보 같아 보이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유 형사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주은이 힘없이 말했다. 유 형사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베테랑 형사가 듣기에도 명도령의 행태는 너무 파렴치했다. 서류를 넘기며 마음을 다잡은 유 형사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그때 유 형사는 주은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꼈다.

2018년 겨울, 주은은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명도령의 호출이 이어졌다. "비공식 모임, 새벽 3시까지 호프집." 명도령은 매일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을 마셨고, 그 자리에 항상 주은과 영수를 불렀다. 주은은 한 시간 거리를 이동해 가게에 들어섰다. 그날도 명도령은 술을 한껏 마셔 취한 상태였다. 새벽 5시가 되자, 주은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졸아?" 눈앞에 명도령의 성난 표정이 들어왔다.

당시 명도령은 그의 다음 말이 가져올 파장을 몰랐던 듯하다.

"새끼들을 찢어 죽여서 보여줘야겠네. 안 그래?"

그 순간, 주은은 본능적으로 '인간' 명도령을 노려봤다. 핏발 선 눈이었다. 주은은 그동안 아이들을 생각하며 모든 걸 버텨냈다. 명도령이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주은은 그 순간만큼은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신도 두렵지 않았다.

명도령은 당황한 듯했다. 주은의 눈을 피하고 황급히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니까 잘하라고..." 들릴 듯 말 듯한 말만 남긴 채, 명도령은 호프집을 떠났다. 주은은 비틀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2019년 1월. 명도령은 영수를 데리고 양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영수는 형님을 바래다줘야 했기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명도령이 모텔에 가고 싶다고 해 영수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군포시청에 다다랐을 즈음, 명도령이 말했다. "내가 운전할게." 그는 막무가내였다.

차는 곡예운전을 시작했다. 차선을 수없이 바꿔댄 명도령은 뒤따라오던 택시와 접촉사고를 냈다. 1초의 정적, 명도령은 영수를 쳐다봤다. 운전자를 바꾸자는 신호였다. 영수는 일단 명도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불가했다. 택시 운전사가 그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주은은 영수의 연락을 받고 급히 경찰서로 향했다. 분명 영수가 사고를 냈다고 했다. 허겁지겁 달려간 경찰서, 5명의 형사들 앞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수사관 질문에 점잖게 답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겁을 먹은 듯, 잔뜩 웅크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주은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당당한 사람은 이영수, 벌벌 떨던 사람이 명도령이었다.

"경찰들? 그거 별거 아냐." 명도령은 건달 시절 얘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이 말을 빼먹지 않았다. 그런데 명도령은 경찰들 앞에서 잔뜩 졸아있었다. 명도령을 모텔로 데려다주고 주은이 영수를 쳐다봤다. 영수도 이상함을 느꼈다. 주은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영수야, 너 아직도 믿어?"

잠깐의 침묵 이후 영수가 답했다.

"아닌 것 같아."

"저는 떳떳합니다" 명도령의 항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1년 동안 명도령 수사에 매진했던 유 형사는 왜 3개 경찰서에서 고소장 접수를 꺼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무속인 사건은 혐의 입증이 정말 어려웠다. 당사자들이 '위안'을 얻었다면 사기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 더구나 가스라이팅 범행은 증거랄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유 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10시간 넘는 경찰 조사에도 힘든 티 한번 내지 않은 부부의 영향이 컸다. 부부는 명도령이 제대로 처벌 받길 원했다. 잃어버린 2년을 보상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명도령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020년 봄. 유 형사는 명도령을 마지막으로 조사했다. 명도령은 항상 변호사를 대동했다. 옷도 깔끔하게 입고, 예의도 참 발랐다. "긴장이 돼서요. 형사님. 담배 한대만 피우고 와도 되겠습니까?" 유 형사는 그런 명도령의 모습을 보며 '부부를 그렇게 괴롭히더니, 수사기관 앞에선 참 나약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조사가 끝나자, 명도령이 유 형사에게 물었다.

"형사님, 이거 인정될 거 같나요?"

1년 내내 혐의를 부인하던 명도령이었다. 주은이 이체한 돈을 온라인 게임, 가전제품 구매, 공과금 등에 썼다는 사실을 보여줬는데도 그는 떳떳하다고 항변했다. 명도령의 뻔뻔한 모습들이 스쳐가자, 유 형사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글쎄요, 재판은 가지 않을까요?"

부부와 유 형사에게 남은 의문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명도령은 2022년 3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년 4개월을 확정 받았다. 법원은 △첫째 딸의 누름굿 △둘째 딸을 위한 재살풀이 △낙태한 아이의 태아천도재 등에 쓴 1,669만 원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했지만, 나머지 1억 원의 무속 행위에 대해선 실제 굿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성폭행, 공갈 등은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다. 유 형사는 그게 부부에게 미안했다.

명도령이 수십 번 늘어놓았던 일대기도 거짓말로 판명났다. 유 형사는 수사과정에서 명도령이 조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본보가 성균관대와 원광대에 명도령의 입학 및 편입 여부를 문의하자,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은과 영수는 더 이상 무속을 믿지 않는다. 대신 과거를 마냥 묻어두지도 않았다. 그간 있었던 얘기를 모두 털어놓자, 가족들도 부부를 탓하지 않았다. 부부는 결혼식을 올렸고, 셋째 아이를 낳았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명도령의 행방은 묘연하다. 배달일을 하다 잠적했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본보는 변호사를 통해 명도령의 입장을 듣고자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명도령이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부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고 했다. 명도령이 주은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개인사를 줄줄이 맞혔냐는 것이다.

그건 정말 신의 목소리였을까. 유 형사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추정은 되지만, 당시 조사하진 않았어요."

9월 6일. 기자는 서울의 한 골목길에 위치한 피부숍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명도령을 한주은에게 소개해준 이지민이 있었다. "명도령을 아시나요?"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설득하자, 그는 2주 뒤에 용기를 내서 기자 앞에 섰다. 자신도 가스라이팅에 시달렸다고 했다. 명도령이 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이상하다고 느껴 도망치듯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다.

지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명도령에게 한주은씨의 직업, 취미, 가족사를 말해준 적 있나요?"

지민이 답했다.

"네, 주은이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요?"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 이성원 기자
취재 : 손영하·이서현 기자, 이지수·한채연 인턴기자
사진 : 하상윤·정다빈 기자
영상 : 김용식·박고은·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전세희 모션그래퍼, 이란희·김가현 인턴PD


이서현 기자
이성원 기자
손영하 기자
이지수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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