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3국, 체코 방문 모두 한동훈 대표가 치받아
원전 수주 등 굵직한 성과에도 빛바래는 모습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순방 전후 기자회견도 해법
편집자주
여의'도'와 용'산'의 '공'복들이 '원'래 이래? 한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와 대통령실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의 뒷얘기를 쉽게 풀어드립니다.
"내 나이로서는 과중한 일정으로 국가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정상외교는 국내 신문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고…"
신문에 실린 대통령 순방기사입니다. 발언의 주체는 어느 대통령일까요. 언뜻보면 요즘 얘기 같지만, 2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DJ) 때 일입니다. 1999년 5월 러시아와 몽골 순방이 옷 로비 사건에 묻히자 못내 서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굳이 오래된 DJ의 발언을 소환한 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순방 직후와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지난주 윤 대통령이 동남아시아 3국(필리핀-싱가포르-라오스) 순방을 마친 뒤 여권 관계자는 "국내 정치 때문에 순방 성과가 묻혔다. 순방 현지에서 참모들이 부단히 성과를 알렸지만 여론의 관심은 '여의도 정치'에 쏠렸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여의도 정치'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가리킵니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 순방 기간(6~11일) 당내외 인사들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7일), "저도 그게(김 여사 공개활동 자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9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관련해) 국민이 납득할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10일) 등의 발언으로 연일 각을 세웠습니다. 대통령실 안팎에선 한 대표가 여론을 앞세워 당정 갈등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윤 대통령의 순방 이슈를 빨아들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실에서 한 대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내비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사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한 대표가 ‘결정의 시간’을 언급한 7일, 윤 대통령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필리핀 군 현대화 3단계사업 한국 참여’ ‘바탄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 MOU(양해각서)’뿐 아니라 각종 필리핀 인프라 사업에 한국 기업 참여를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이어 8일에도 물류허브인 싱가포르를 방문해 공급망 동맹을 맺으면서, 불확실한 대외 여건 속에 한국의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것이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도 한 대표의 ‘김 여사 활동 자제’ 발언이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순방의 빛이 한 대표의 김 여사 저격에 가려 그늘에 묻힌 건 이번만이 아닙니다. 앞서 윤 대통령의 체코 원전 순방(9월 19~22일) 막바지에 언론 보도를 통해 한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김 여사 관련 민심 전달’ 등을 이유로 독대를 신청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에 대통령실은 한 대표 측에서 의도적으로 언론에 해당 내용을 흘렸다면서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직 정확한 진위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여권 내부에서는 "윤 대통령 귀국 직후 대통령실에서 보고를 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이 귀국 비행기에 있는 동안 보도가 먼저 나온 꼴이 된 걸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7월 윤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와 워싱턴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국내에서는 ‘한 대표-김 여사’ 이슈가 언론을 뒤덮었습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난 1월 김 여사가 한 대표에게 보낸 텔레그램 메시지를 무시했다는 논란이 불거진 것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세일즈 외교’에 진심입니다. 첨단산업 및 기술 동력 확보, 기업의 해외 수출, 한미 동맹과 한미일 결속을 바탕으로 한 가치 외교 등 지난 2년 넘게 보여 준 외교 행보에서 분명한 성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해 순방 효과를 ‘유독’ 누리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한국일보 9월 16일자 ''순방 효과 못 누린 尹... 지지율, 체코에선 반등 노릴 수 있을까' 기사에서 다룬 것처럼 체코 순방 전 18번의 윤 대통령 순방 전후로 지지율 변화(한국갤럽)를 분석한 결과, 3%포인트 이상 지지율이 상승한 경우는 고작 3번에 그쳤습니다. 임기 초 순방 때 겪은 우여곡절을 지나 이제야 굵직한 성과를 내고 있는데 한 대표 이슈가 블랙홀마냥 모든 것을 삼키고 있으니 대통령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인 거죠.
답답한 대통령실 분위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의 사례를 살피다 눈에 들어온 게 DJ였습니다. 25년 전 취재 관행인지 모르겠지만 DJ 사례를 찾아보니 순방 현지에서, 그리고 귀국 직후인 서울공항에서 DJ는 순방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앞에 서술한 서운한 심경 발언이 나온 것도 물론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DJ는 시간을 할애해 질문을 받고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론에 화도 냈지만 훗날 사과도 했다고 합니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가 부딪치는 건 대체로 김 여사와 관련한 이슈 때문인데, 최근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의 폭로 국면에서 볼 수 있듯, 대통령실의 대응은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대통령실은 언론이 신뢰할 수 없는 명씨에게 놀아나고 있다고 불만이 가득한데, 그렇다면 ‘이러이러하니 놀아나지 말라’고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국민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입니다.
박선숙 전 청와대 수석은 DJ서거 13주기를 앞둔 지난 2022년 8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대통령수칙 열 번째 항목에 ‘언론의 부당한 비판에 소신 바꾸지 말아야’란 내용을 넣은 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걸 겁니다.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저한테 ‘기자는 우리가 만나는 첫 번째 국민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사람이 기자니까 성실하게 답변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이 대목을 한번 곱씹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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