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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가 놓친 절반의 세계...'여성 작가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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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가 놓친 절반의 세계...'여성 작가들'이 여기 있다"

입력
2024.10.23 16:33
수정
2024.10.2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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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구자로 구성된 '현대미술포럼'
20세기 여성 미술가 105명 발굴·조명
주류 미술사가 놓친 여성 미술인 초상
"동시대 여성 미술의 뿌리...후속 이어져야"

현대미술포럼 기획자 윤난지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현대미술포럼 기획자 윤난지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1975년 금성출판사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이란 야심작을 펴낸다. 한국 근현대 미술계 거장 100명을 선정해 작가당 한 권씩 모두 100권의 책을 출판했다. 여기에 포함된 여성 작가는 고작 4명. 1980년대에 나온 증보판 120인 선집에도 여성 작가는 한 명이 추가되는 데 그쳤다. 왜일까. 최근 나온 책 '그들도 있었다(1·2권)'의 저자 53명 중 한 명인 윤난지(71)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21일 인터뷰를 시작하며 "남성 작가 위주의 주류 미술계가 호명하지 않아 빗겨 서 있었을 뿐, 당시에도 여성 미술가는 차고 넘쳤다"고 단언했다. "인구의 반이 여성이듯 미술인의 반은 늘 여성이었어요.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누락된 절반의 세계가 있다는 걸 더 늦기 전에 알리고 싶어서 책을 썼지요."

현대미술포럼이 기획한 책 '그들도 있었다' 1, 2권. 각각 강은엽의 '밤과 낮', 정강자의 '자화상'을 표지에 담았다. 나무연필 제공

현대미술포럼이 기획한 책 '그들도 있었다' 1, 2권. 각각 강은엽의 '밤과 낮', 정강자의 '자화상'을 표지에 담았다. 나무연필 제공


105명의 여성 작가 엮어 만든 근현대 미술의 초상

윤난지 명예교수는 "사학자에게 역사는 대화"라며 "온전한 미술사가 전해지기 위해선 더 많은 여성 작가와 작품을 기록하고 엮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기찬 인턴기자

윤난지 명예교수는 "사학자에게 역사는 대화"라며 "온전한 미술사가 전해지기 위해선 더 많은 여성 작가와 작품을 기록하고 엮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기찬 인턴기자

윤 명예교수는 '현대미술포럼'의 기획자다. 현대미술포럼은 1995년부터 여성 연구자들이 모여 현대 미술텍스트를 읽으며 공부하는 연구 모임. '읽기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공부가 쌓이면서 다수의 책을 쓰거나 번역해 냈다. 현대 여성 미술가를 다룬 '그들이 있었다'는 이들의 최신작이다. "잊힌 여성 미술가를 조명해 한국 미술사를 바라보는 공정한 장을 만들어보자"는 윤 명예교수의 제안에 회원들이 호응하면서 2019년 9월 작업을 시작했다.

53명의 필자가 5년 동안 그려낸 한국 여성 미술인의 초상은 방대하다. 일정한 숫자를 정하지 않았는데 남성 작가의 수와 엇비슷한 105명이 추려졌다. 한국 미술 근대화를 이끈 최초의 여성 작가 나혜석, 백남순에서 시작해 1950년대 중반 이후 테피스트리, 조각 등으로 독창적인 작업을 전개한 작가들을 고루 조명한다. 섬유예술을 현대미술의 한 분야로 개척한 이신자와 성옥희, 남성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조각 분야에 안착한 나희균, 김정숙이 대표적이다. 한국화라는 전통 장르를 재해석한 이인실, 문은희, 이숙자, 1980년대에 부상한 페미니즘을 주제로 작업한 윤석남, 김인순, 박영숙까지, 책에 담긴 다양한 스펙트럼을 따라 읽기만 해도 한국 여성 미술사를 조망할 수 있다.

윤 명예교수는 "에이스' 작가에서부터 숨은 작가를 고루 포함해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다"며 "명단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자 한 사람이 작가 2, 3명을 맡아 인터뷰와 고증을 거쳐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정강자의 '자화상'. 1994년. 정강자 제공

정강자의 '자화상'. 1994년. 정강자 제공


박일순의 '나무'. 1988년. 박일순 제공

박일순의 '나무'. 1988년. 박일순 제공


"여성 작가의 이름은 이어진다"

나혜석의 '자화상'. 1933년.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혜석의 '자화상'. 1933년.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여성 미술인들의 삶은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윤 명예교수의 말처럼 많은 여성 작가들이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을 겪기도 하고 남편이 같은 미술인인 경우 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거나 상대적으로 작업이 평가절하되며 잊히는 경우가 흔했다. 이 때문에 책이 가장 부각한 것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 화가 나혜석의 '자화상'을 필두로 작가마다 대표작 도판을 3점씩 수록해 지상 전시를 펼쳐 보인다. 윤 명예교수는 "스스로 여성주의를 의식했든 안했든 여성 미술인 작품에는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성'이 깔려 있다"며 "엥포르멜, 단색화 운동 등 남성적 주류 미술 흐름에 묻힌 섬세하고 자유로운 여성 미술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윤 명예교수는 여성 현대미술연구자들의 숙원이었던 이 작업을 끝으로 30여 년 이어온 포럼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러면서도 뛰어난 여성 미술인에 대한 조명은 계속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가를 꿰고 있다고 생각한 저만 해도 새로 알게 된 작가가 적지 않았어요. 여성 작가들이 조명되는 최근 미술계 분위기가 겹치면서 조각가 김윤신처럼 우리가 주목한 작가가 순식간에 세계적 작가로 부상하는 짜릿한 장면도 목격했죠. 세계적으로 여성 미술이 각광받는 이면에는 여성 미술 집단이라는 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불러내야 할 이름이 많습니다."

현대미술포럼 소속 필자들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산지갤러리에서 열린 '그들도 있었다' 출간기념회에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무연필 제공

현대미술포럼 소속 필자들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산지갤러리에서 열린 '그들도 있었다' 출간기념회에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무연필 제공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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